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들어가기 전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20대 청춘들의 다사다난하고 아슬아슬한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울림이 있던 작품.
성소수자(퀴어)의 사랑 이야기가 주제인 작품이며, 영이라는 남자 주인공이 메인인 4가지 에피소드로 전개됩니다. 우선 이 책은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유쾌하게 가벼운 듯 풀어내시는 듯~ 하지만 또 꽤나 묵직한 메시지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어요.
작가님의 말을 인용하길, "네 편의 소설 속 화자인 '영'은 모두 같은 존재인 동시에 모두 다른 존재이다." 이 문장을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이해했어요. 한 편, 한 편 성장해가는 영을 보며 안쓰럽기도 대단하기도 그리고 어디선가 살아서 또 다른 성숙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낼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 재희
성소수자 남자 주인공 '영'과 이성애자 여자 '재희'의 우정
올해 10월 1일에 개봉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줄거리에 큰 영향을 준 에피소드입니다.
음주 가무와 사랑을 매일 게을리하지 않는 재희와 영의 우정 이야기이며, 개인적으로 영화도 책도 많이 울었던 에피소드입니다.
냉동실 속 말보루 레드, 지은이, 낙태, K3
2.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주인공인 '영'이 5년 전에 사귀던 남자에게 썼던 편지(일기), 그리고 그의 편지로 시작되는 에피소드.
취업 준비 중이던 영은 엄마의 병간호를 함께 병행하며 바쁘게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중 인문학 교양 강좌에서 우연하게 만난 19살 많은 그 남자와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커피 한 모금, 우럭, 제국주의, 파스타
3. 대도시의 사랑법
주인공 '영'과 그의 연인 '규호'의 에피소드입니다.
규호와의 만남,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의 시작, 3년간의 대도시에서의 삶의 시작과 헤어짐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지만 사랑하기에 이별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
카일리, 유설희, 상해
4. 늦은 우기의 바캉스
주인공 '영'이 사랑했던 연인 '규호'와의 이별 후 이야기입니다.
규호가 떠난 후 제일 먼저 함께한 침대를 버린 영.
그리고 퇴사를 했고, 규호와 함께 갔던 도시 방콕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하비비라는 남자를 만났고, 그렇게 진행되는 에피소드입니다.
하비비, 방콕, 규호
문장 수집
대도시의 사랑법 속 문장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기 마련이었다.
비극도 희극도 너무 자주 반복되면 하나도 좋을 게 없어서 이 모든 패턴이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서른한 살은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한 나이는 아니었다.
침묵의 방식으로 포기와 체념을 배운 나
깨달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뒤늦기 마련이니까.
오늘부터 저를 우럭이라고 부르세요. 쫄깃하게.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욕망일까, 기쁨일까, 경탄일까, 당황일까. 그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호기심에 기초한 경멸일까, 아니면 나와 같은 종류의 것일까.
그가 자꾸 자신의 가족에 대해,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해 얘기하는 게 불편하면서도, 좋았다. 가족 얘기를 할 때면 자기감정에 취해 마치 연극배우라도 된 것처럼 구는 게 좀 웃겼고,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은 좋았다. 숱한 밤 동안 그의 얘기를 하염없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자리한 그라는 존재의 퍼즐을 완벽히 맞추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그의 인생, 내가 모르는 그의 습관, 내가 모르는 그의 호흡까지도 오롯이 재구성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나는 한동안 언제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가 나의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을 것만 같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를 만나는 시간은 새벽의 몇 시간에 불과했으나 나의 하루는 그 짧은 시간으로 말미암아 완벽히 재편되었다.
나의 정치적인 무지가 부끄러웠다기보다는(그딴 걸 부끄러워해본 적은 없으므로) 그가 멍청하고 생각 없는 내 본연의 모습에 질색할까 봐, 그래서 다시는 나를 봐주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당시의 나는 어떻게 하면 그가 나를 좋아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데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고, 필요하다면 나의 가치관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섹스를 하지 않는 밤을 보냈다. 아무것도 나눠 먹지 않았고 대화는 겉돌았으며 서로의 사이에 흐르던 거리감은 좁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씨는, 내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러는 당신도 내 세상을 알지 못하잖아요.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복잡해지려고 하면 얼마든지 복잡해질 수 있는 게 인생이므로 생각을 멈추자, 마음먹었다.
결국에 우리는 함께 따뜻한 파스타 한 접시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그를 안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인생에서 그래선 안 될 일 빼면 남는 게 없다.
헤어짐과 화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평소에는 좀체 감정 기복이 없는 사람인데. 아마도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하나도 해주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죽은 상태로 내 사랑의 대상이 되고, 추억의 대상이 되고, 꿈의 대상이 되며 결국 대상으로 남는다. 내 기억 속의 규호는 언제나 완결된 상태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그렇게 규호와 나의 기억도 유리막 너머에서 안전하고 고결하게 보존된 상태로 남는다. 영영 둘인 채로.
휴고보스 셔츠에, 버버리 트렁크스, 미소니 양말이라니. 아, 정말 너무나도 아이비리그 나온 40대 아저씨의 취향이다 싶었고 이 모든 진부함에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우리는 서로의 무릎을 붙잡은 채 휘청거리는 배를 견뎠다. 규호의 뜨거운 무릎에 손을 대고 있자니 이상하게 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배가 요동쳐도 불안하지 않았다.
언제라도 손을 뻗으면 그 콧잔등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여자는 세상천지에 슬픈 일이라고는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맑게 웃는다.
늦은 우기에도 비는 오고, 다 늦어버린 후에도 눈물은 흐른다.
내 소설 속 가상의 규호는 몇 번이고 죽고 다치며 온전한 사랑의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현실의 규호는 숨을 쉬며 자꾸만 자신의 삶을 걸어나간다.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 해설 및 작가의 말
내 소설 속 가상의 규호는 몇 번이고 죽고 다치며 온전한 사랑의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현실의 규호는 숨을 쉬며 자꾸만 자신의 삶을 걸어나간다.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침대는 누군가와 함께 뜨겁게 달아올랐던 시절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지만, 결국 홀로 남겨져 견뎌내야 하는 주인공 곁에 끝까지 남아 있는 진정한 동반자다.
소설은 이런 재희의 활력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재희를 한순간의 실수로 절망에 빠지는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45~46면) 이해하게 된다.
사회에서 정상이라 말해지는 생애 주기 속으로 편입되지 못한 관계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고 끝내 슬픔으로만 남는 것일까.
“항상 나의 곁에 있어줘. 꼭 네게만 내 꿈을 맡기고 싶어”(65면)라는 그들의 노래는 20대를 내내 함께 헤쳐온 두 사람을 위한 OST다. 결혼을 거치는 공인된 관계가 아니라면 미완의 관계로 치부되는 사회 속에서, 온갖 비밀을 공유하고 연대했던 그들은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클리셰에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또 다른 사랑의 관계로 남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지독하게 멀어지고 싶은 엄마와 ‘나’는 자꾸만 겹쳐진다.
비극의 중심에 카일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카일리가 있기에 자신의 특별한 한 조각이 완성되는 것이다.
소설에서 규호의 공간이 ‘제주(섬)’에서 ‘인천’을 거쳐 ‘서울’로 그리고 ‘상해’로 점차 넓어지는 반면, 화자의 공간은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눈부신 시절은 지나갔으며 되찾을 수 없다는 것, 불멸과 덧없음이 하나가 되는 이 정조는 이번 소설집의 한가운데 있는 어떤 것이다.
박상영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장렬하게 산화되어버리기를, 언제나 지금 여기만을 사는 삶을 택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 편의 소설 속 화자인 ‘영’은 모두 같은 존재인 동시에 모두 다른 존재이다.
글을 쓸 때 (혹은 일상을 살아갈 때) 홀로 먼지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손에 뭔가 닿은 것처럼 온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감히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쥔 채 이 사소한 온기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내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오롯이 나로서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