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학교에서 시 읽기_류시화
제목부터 설렌다.
시에게 납치당하고 싶다.
'내가 만약 시인이라면 당신을 시로 납치할 거야. 시어와 운율로 당신을 사로잡고, 제비꽃으로 당신을 노래하고, 이마에서 녹는 눈으로 당신의 감정을 위로하고, 내 시를 완성하기 위해 바람 부는 해변에 당신을 혼자 서 있게 할 거야. 당신의 이름을 시에 쓸 때마다 행갈이를 할 거야...'
마음의 무늬를 표현하기 위해 전 세계 시인들이 수없이 고쳐 쓴 시들. 투명한 감성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긴 좋은 시 모음집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이은 인생학교에서 읽는 시, 류시화 시인의 해설과 함께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5년 동안 '아침의 시'라는 제목으로 많은 독자들의 아침을 깨운 시들을 모았다.
첫 장부터 나의 발길을 잡아 아예 주저앉힌다.
두 사람_라이너 쿤체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한 사람은 별을 통과해
배를 안내하고
한 사람은 폭풍을 통과해
배를 안내한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을 때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서정시인 라이너 쿤체의 대표 시 중 하나로, 결혼 축시로 자주 낭송되는 시다.. 배, 별, 폭풍이라는 평범한 세 단어가 인생의 드넓은 바다로 의미를 확장하면서 심호한 메시지를 전한다. 한 배에 탔다는 것은 운명 공동체이다. 수많은 파도와 암초들의 밤바다를 통과하지만 두 사람의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고 화창할 것이다. 힘들었던 시기조차 웃으며 회상할 것이다. 삶의 여정이 어느 목적지에 이를지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에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파란 바다를 기억하리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두 사람인가.
그렇다, 함께 노 저어 가는 두 사람의 리듬이 맞으면 인생은 노래가 된다.
더 푸른 풀_에린 헨슨
더 푸른 풀을 펼치는 순간 나와 당신의 모습이 담겨 있어서 눈물겹다.
어떤 사람의 풀이 푸르다고 해서 그 집 정원은 언제나 화창할 것이라고, 흐린 날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당신 역시 종종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서도 누구보다 환하게 웃지 않는가? 자신의 인생이 더는 자신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용기를 내어 세상에 손을 내밀지 않는가?
삶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영웅이 되거나 불멸의 인간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으로 마비되어도 한 걸음씩 내딛고, 외로워서 사람들과 함께하라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도 나누라는 것이다.
그 겨울의 일요일들_로버트 헤이든
우리 부모님, 그리고 자식의 부모가 된 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지금 깨달은 것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자식의 참회가 하늘까지 닿을지 모르겠다. 좀 더 빨리 참회해서 우리 곁에 계실 때 그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짧지만 좋은 시의 요소가 다 담겼다. 눈에 보이는 듯한 시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 거기에 '잠복한 분노', '경계', '냉담한 말' 같은 단어들이 주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까지. 이 모든 이미지들이 겨울 아침의 시공간 안에 어우러져 가슴 뭉클한 여운을 안긴다.
사랑은 의무로 견고해지고 거룩해진다. 이 시의 화자처럼 아주 뒤늦게야 그 노고를 이해한다 해도, 그토록 윤나게 구두를 닦아 주던 이가 세상에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감사함을 안다고 해도. 수도승처럼 새벽을 깨우며 그 의무를 완수해 나가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원_에드윈 마크햄
우리는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고서 자신의 주장과 다르거나 자기편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동그라미 밖으로 밀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제로는 다 같이 연결된 '우리'인데도.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있다. 계속 밀어내면 원은 점점 작아진다. 더 많이 초대하고 끌어들일수록 원은 넓어진다.
더 큰 원을 그리자. 그리고 그 원 안으로 가능한 한 모두를 초대하자.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_팻 슈나이더
삶은 둘로 나뉜다.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거나, 어떤 것에서도 발견하지 못하거나, 주위의 사물을 통해 당신이 세상과 다시 사랑에 빠지는 그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전에는 어떻게 이것들을 못 볼 수가 있었지?'
평범한 것들에 대한 특별한 느낌, 일상성의 회복, 그리고 내 옆에 있어 준 것들에 대한 감사, 이것이 이 시의 주제이고 우리 삶의 주제이다.
시인이 될 수 없다면 시처럼 살라.
시는 시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쓰고, 독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읽는 문학이다.
이 시집은 전 세계의 시인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쓴 시들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읽으면 된다.
과일의 맛이 과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각과의 만남에 있는 것처럼 시의 의미는 종이에 인쇄된 단어들 속이 아니라 독자와의 교감에 있으니.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느끼고 이해하고 인생의 해변에서 시를 낭송하자.
어디선가 시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않은 유리병 편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