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초임이 되고 싶은 퇴임

by 정유스티나
에필로그.jpg 초임_새싹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통화를 하면서 앗, 내 폰 어디 있지? 하는 내가, 어제 점심때 무엇을 먹었는지 조차 가물가물한 내가.

거의 반세기가 지난 초임 시절의 이야기는 마치 오늘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마치 어제 발령장을 받고 소달구지 덜컹이는 시골길을 달려 미니어처 같은 아담한 학교로 달려간 듯이.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 그때의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 있을 것 같은 환영이 글을 쓰는 내도록 내 머리를 맴돌았다.

유난히 뽀얀 피부 때문에 아이들에게 더 거리감을 주었다는 제자의 말에 화들짝 놀랐었다.

시골의 실정을 모르고 이 닦아라, 책 읽어라, 손톱 깎아라. 목욕해라.

요구 사항이 많아서 힘들었다는 말에 마음이 덜컹 내려앉고 상심했었다.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다가가고 싶은데 요즘 표현으로 '차도녀' 같아서 일부러 더 어깃장을 놓았다고 키가 180센티나 자란 제자의 고백에 마음이 저렸다.

좀 더 따스하게 대할걸.

이 안 닦으면 어때, 손톱 좀 길면 어때, 목욕 좀 덜하면 어때.

그냥 무조건 안아주고 사랑해 줄 걸.

초임 교사의 미성숙한 애정과 무차별적인 원칙으로 아이들을 어지간히 괴롭혔구나.

하지만 얘들아, 소심한 반론을 펴자면 책 읽기는 절대 양보 못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너희들을 위해서야.

아, 이 말은 안 하는 것이 맞지.

너희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휘두르는 폭력에 가까운 언행으로 상처받는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알잖아.

그래, 이 말은 취소할게.


연재를 하면서 행복했다.

이십 대 풋풋했던 나를 만났고, 건강하셨던 부모님을 뵈었다.

초임 선생을 따스하게 인도해 주셨던 동료 선생님들의 반가운 얼굴도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사무치게 그리운 아이들을 만났다.

산머루보다 더 까만 눈동자와 흑진주보다 더 반들거리는 얼굴로 온 마음으로 환대해 주던 그 아이들.

서릿발 같은 잣대에 여린 마음에 선혈도 흘렀을 그 아이들.

하나하나 안아주면서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내 품 안에서 파닥이는 작은 새처럼 고운 숨결로 화답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들의 선생님. 우유빛깔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이제 세월의 강을 거슬러 그 시절로 돌아갔던 연어가 다시 내가 사는 이곳에 회귀했다.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내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잘 살아야 한다.

초임 교사가 아이들에게 내밀었던 깐깐한 도덕성을 나에게 들이밀어야 한다.

지금처럼. 지금처럼만.


그동안 저와 함께 레토르 감성 물씬 풍기는 시간 여행을 떠나 주신 독자님께 머리 숙여 큰 절 올립니다.

저와 비슷한 동시대를 관통해서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잘 견뎌 오셨다고 찐한 포옹을 하고 싶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케케묵은 이야기로 들리셨을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하다는 악수를 건네고 싶습니다.

지나간 것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주셔서 마음을 얹어 주고, 치열한 세대를 온몸으로 겪어 내고 계신 젊으신 분들에게는 볼에 찐한 립스틱 자국을 남겨 드리겠습니다. 비록 거부하실지라도.

세련되지 못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함께 걸어 주시고 공감해 주신 독자님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햇살이 가득하시길, 이제 퇴임 교사가 두 손 모아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세배.jpg 얘들아~세배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