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사기는 아니었다

태국여행의 추억

by 정유스티나
추억.jpg 떠나자, 추억 여행



사람은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를수록 무엇으로 사는가?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힘든 나이가 되면 '추억'으로 산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가 떨리기 전, 심장이 떨릴 때 여행을 많이 하라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몇 가지 있다.

첫째, 건강

둘째, 시간

셋째, 돈

이외에도 좋은 동반자, 돌아올 곳이 있어야 좋은 여행이 된다.

이팔청춘에는 건강과 시간은 있지만 돈이 없었다.

중년의 나이에는 건강과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었다.

해 질 녘 인생의 황혼이 다가오면 시간과 돈은 있지만 건강이 없을 경우가 많다.

이래저래 추억을 쌓기 위해, 삶의 지표를 찾기 위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떠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우리네 인생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원초적인 본능과 귀소 본능이 동시에 있다.

떠나면 돌아오고 싶고, 돌아오면 떠나고 싶다.


나는 여행에 진심인 편은 아니었다.

낯선 곳에 대한 동경과 변화를 무서워하는 두려움이 딱 절반이었다.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에 부닥치면 떠남을 선택하기보다 주저앉음으로 추가 기울었다.

여행하기에 좋은 직업을 가졌고, 실제로 동료들은 방학만 되면 비행기를 탔고 기내식도 먹었을 것이다.

내가 여행에 대한 마음이 절실했다면 나도 그 무리에 끼었을 것이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러지 못했다.

그렇던 내가 여행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환갑을 맞이했을 때부터였다.

그 해에 10일 이상의 해외여행을 3번이나 했으니 기둥뿌리 반 개는 뽑혔다.





태국.jpg 태국




첫 여행지는 태국이었다.

막내딸과 함께 큰 계획도 없이 떠난 그곳에서 가이드를 잘 만나 객실 안에 작은 방이 3개나 있는 초호화판 숙소에 머물렀다. 마침 비어 있는 객실이라 부모님과 함께 여행 온 효녀 코스프레를 제대로 하는 바람에 얻어걸린 행운이었다. 가이드가 총각이었는데 예쁜 우리 딸에게 작업을 거는 것이라는 건 상상도 안 했다.

여행 내내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가이드의 서비스에 몸 둘 바를 못하고 감사했다.

예쁜 딸은 태국에서 먹히는 미모인지 여행 중에도 현지 청년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딸~태국에 와서 연예인으로 데뷔해 봐. 앵벌이 좀 시키자."

우리는 딸을 잘 둔 덕분에 V.I.P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여행 마지막 날에 가이드는 본심을 드러내며 번호를 따려고 했다.

그동안 받은 환대가 고마워서 거절하기도 애매했다고 딸이 얘기했다.

다음에 태국 자유 여행 갈 때 도움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번호를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 이후의 히스토리는 상상에 맡기겠다.

살짝 걱정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선의를 오해한 것이 미안하다는 것만 밝힌다.


여행 일정 중 선택관광으로 우리 모녀는 장미꽃잎이 욕조에 핀 곳에서 풀 마사지를 받았다.

남편은 마사지가 싫다고 했다.

가이드가 남편분은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난생처음 받는 전신 마사지는 황홀 그 자체였다.

태국여행 중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2시간의 시간이 흘러 남편과 만났다.

가이드가 말했다.

"제가 가이드 생활 10년을 했지만 사장님 같은 분은 처음 뵙니다."

우리가 마사지하는 동안 가이드는 남자들이 환장한다는 멋진 쇼를 관람시켰나 보다.

그런데 들어간 지 10분 만에 튀어나온 남편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우리 딸 생각하니 도저히 못 보겠어요."

그랬다. 그곳은 퇴폐 쇼를 하는 곳이었다.

중학생쯤으로 밖에 안돼 보이는 앳된 여자애가 멀쩡하게 등장해서는 옷을 하나하나 벗어던지며 이상한 포즈로 춤을 추는 곳이라고 했다.

술이라고는 한 잔도 못 마시는 남편은 맨 정신으로 그것을 볼 수가 없더란다.

딸보다 한참은 더 어린 그 아이를 보는 것이 괴롭고 죄악처럼 느껴져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더란다.

"어이구, 이 양반아. 돈이 아깝게 안 보고 나오면 어떡해. 마누라 없을 때 보지 또 언제 봐. 좋은 기회를 놓쳤구먼 쯧쯧."

빙글빙글 웃으며 농을 쳤지만 이 남자가 내 남자인 것이 이렇게나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가이드님, 우리 아빠에게 그런 곳으로 안내하시면 어떡해요!"

딸의 표독스러운 반격에 가이드는 어쩔 줄 몰라했다.

"죄송합니다. 진짜 존경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이 술을 마실 수 있었으면 안광을 번쩍이며 끝까지 관람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남편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 혹시 신부님이시냐고 물을 정도로 인자한 비주얼을 가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응답한다.

"얼굴이 사기예요."

그런데 태국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면 완전 사기는 아닌 것 같다.

아, 이래서 추억을 많이 쌓으라고 하는구나.

추억은 상대적으로 현실에서 떠났을 때 더 진하게 다가오니 어디론가 많이 떠나야겠다.

베낭 하나 짊어지고 훌쩍.



배낭.jpg 베낭하나 매고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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