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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종이가 아니다

by 정유스티나

손녀들이 갖고 노는 바비 인형을 보면 50년 전 내가 애정했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눕히면 눈이 감기고 세우면 눈을 뜨는 인형을 갖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다. 대신 종이로 만든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며 소꿉놀이하면서 긴 하루를 찰나로 만드는 마법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문방구점에서 파는 종이 인형을 사는 것도 사치였다. 사이다 하나로 오빠, 나, 동생까지 소풍을 다녀왔으니. 그다지 궁핍한 살림살이는 아니었지만 먹고사는 일은 늘 벅찼다. 사치스러운 놀이나 취미활동은 이층 집에 사는 내 친구 현주에게나 가당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깨가 쏟아지는 즐거움을 포기할쏘냐. 빳빳한 마분지에 인형을 그렸다. 얼굴만 큰 6등신쯤 되는 아이였다. 인형이 확보되었으니 인형 옷이 필요했다. 만화책에서 본 공주 옷부터 상상의 날개를 편 각종 옷들이 종이 위에서 탄생했다. 어깨 부분에 사각형 고리를 더 그려 넣어서 인형에게 입히는 시스템이었다.

풍성한 레이스로 발을 덮는 긴 드레스, 무릎 위에 올라오는 짧은 미니스커트에 스트라이트 티셔츠, 목부터 발끝까지 별모양 단추가 달린 점프슈트, 밍크로 끝처리를 한 망토와 몸에 쫙 붙는 스니커즈, 퍼프소매와 리본 장식의 블라우스와 체크무늬 멜빵 치마, 더 나아가 승마복, 발레복, 중국옷, 일본옷, 에스키모옷 등 기능과 국가별 옷까지 섭렵하였다.

어디 옷뿐이랴. 그에 맞는 가방, 모자, 신발, 머리핀, 머리띠, 머플러 기타 등등 소품 디자인으로 나의 창작 열정에 화룡정점을 찍었다. 나의 유전자에 패션 디자이너의 소질이 숨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래 희망 칸에 ‘패션 디자이너’라고 쓸 정도로 나의 인형 옷 제작은 점점 퀄리티가 높아져 갔다. 다만 내 작품에 내가 제일 많이 감탄하고, 나의 만족도만 평점이 별 다섯 개로는 모자랐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동생은 물론이고 친구들의 인형 옷 제작 의뢰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나름 인정도 받았다. 인형옷을 만드느라 방과 후 시간은 늘 바빴다. 나름 창작의 고통을 거쳐 스케치를 하고, 색연필로 곱게 색칠한 후 곱게 잘라 나의 아기에게 입히는 그 순간의 희열은 아직도 내 세포가 기억하고 있다.

급기야는 엄마, 아빠, 딸, 아들, 모두 4명의 인형 가족이 줄줄이 만들어졌다. 옷과 소품을 그리고 색칠하고 오리고 갈아입히는 즐거움에 빠져 국민학교 고학년 시절을 다 보낸 것 같다. 언제부터 그 작업을 그만둔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 온갖 화려함으로 치장한 인형 가족을 갖고 노는 것은 나의 가장 큰 사치이자 판타지였다. 나의 분신 같은 종이 인형과 종이옷을 담은 메리야스 상자는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보물 상자였고 내 유년의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요즘 문방구나 마트에 가보면 눈이 휘둥그래할 정도로 화려하고 세련된 인형들이 많다. 바비인형을 필두로 건전지를 넣으면 오색찬란한 레이저를 발사하고 움직이며 말까지 하는 인형이 진열대에서 아이들을 보고 손짓한다. 하지만 그 시절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탄생시킨 아이들만큼 따스한 피가 흐르지 않는다.

인형도 점점 생존에 대한 위기 앞에 놓인 듯하다. 스마트폰이나 패드를 켜면 펼쳐지는 휘황찬란한 동영상의 나라에 입문하는 동시에 가차 없이 버림받는다. 요즘 아이들이 중독되고 열광하는 각종 동영상들은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우기에 도움보다는 장애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영상물에 그대로 노출되어 생각할 필요가 없고, 생각할 생각도 없이 그냥 흡수만 한다. 문제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결과가 더 많고 또한 그것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어린 시절 종이 인형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종이 인형 가족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지어 내며 나의 전두엽 기능은 진화를 거듭했다. 그 시절 나는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종합 예술인이었다. 인형을 만들면서 신체의 비율을 배우고, 인형 옷을 제작하며 패션 감각이나 색채에 대한 조화로움을 익혔으며, 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이야기를 지어내고 꾸려 나가는 창의성을 길렀다.


그들은 종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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