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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 것들아

인생 선생님

by 정유스티나

내 고향은 경상도 어느 골짜기의 소도시이다.

교통의 요지라고 하지만 발전이 늦어 살짝 답답함을 느끼는 고장이었다.

천지가 개벽한 다른 지방에 비하면 참 낙후되었다고 툴툴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고향 떠난 지 어언 40년이 되어 가지만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오히려 고마운 동네이기도 한다.

많은 선생님의 가르침 속에서 자랐지만, 여고 시절 1학년부터 2학년까지 국어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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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대를 졸업하셨으며 다소 우악스럽지만 서울말을 쓰는 노처녀 선생님이셨다.

키도 크고 뱃살은 삼겹으로 접혔는데 다리는 너무나 가늘고 미끈했던 기억이 강렬하다.

국어 시간에 당번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양은 주전자에 물을 가득 채워 놓는 것이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침을 튀기며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셨기에,

수업 중간중간 주전자를 통째로 들고 마치 막걸리 마시듯이 벌컥벌컥 들이켜셨다.

애들이 잘 못 알아듣고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물을 더 자주 들이켜셨고

우리의 입안은 반대로 바짝바짝 메말라 갔다.

국어 시간은 늘 공포와 긴장의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질문을 던지시면 알던 것도 머릿속이 깜깜해지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선생님은 지명할 때 오늘 날짜에 맞는 번호를 부르셨기에,

국어 수업이 든 날짜가 내 번호 끝자리가 있으면 아침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했다.

한마디로 재수 옴 붙은 날인 것이다.

만약 틀리기라도 하면 부러진 분필을 냅다 우리의 이마에 꽂는 신공까지 발휘하셨다. 후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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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책 페이지마다 미농지 그러니까 습자지를 한 장 한 장 끼워서 붙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국어책 두께는 다른 책의 3배는 족히 되는 뚱보책이었다.

꼼꼼하게 한 줄 한 줄 미농지에 줄 단위로 밑줄 긋고 필기하고 완전학습을 열망하셨지만

우리의 실력은 뜻대로 따라 주진 못했다.

선생님은 실력만큼이나 엄하고 무서워서 선생님 앞에 서면 오줌을 찔끔 지릴 정도였다.

그날도 공포반 열공모드반으로 수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에게 공포의 분필이 냅다 내려 꽂히는 것이 아닌가?

정확히 내 손끝을 맞고 튕겨 나갔다.

심장이 멎을 듯 놀라서 아픔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왜 그러지? 난 집중해서 수업 잘 듣고 있었는데?

아픔보다 당혹스러움과 무서움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름 모범생인 나에게 일어난 현실에 친구들도 입을 막고 놀란 눈동자만 떼굴떼굴 굴러가고 있었다..

“이 촌것아~볼펜 좀 돌리지 마! 정신 사나워 죽겠잖아! ”

그랬다.

그 당시 나의 손끝에는 기다란 물체만 있으면 마구마구 돌리는 습관이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학생들에게 유행이었다.

볼펜이나 연필은 기본이고 젓가락까지 돌리다가

오이나 당근 같은 기다란 식재료도 손에 잡히기만 하면

무의식적으로 내 손 위에서 헬리콥터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동시에 볼펜을 계속 돌리고 있었으니 열폭하신 것이고, 그중에 내가 시범 케이스로 딱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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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말끝마다

"이 촌 것들아~이것도 모르면 어떡하냐?"

“이 촌 것들아~이래서 대학가겠니?” 하시며 우리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면서

모욕적인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따발총처럼 쏘아대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 인권 탄압으로 인터넷을 도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선생님 말씀이 곧 법이었기에 감히 반항을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더 울컥하는 건 진짜 촌년에게 촌년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 않나?

하지만 이건 조족지혈이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쏜 최대의 공포탄은 방학 숙제로 시 100편을 몽땅 외워야 했다.

개학 후 한 명씩 앞에 나와서 랜덤으로 제시하는 시를 외워야 했다.

나는 늘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숙제 검열을 해치웠다.

내가 특별히 자신 있어서가 아니라 차례를 기다리는 그 숨 막히는 순간들을 견딜 재간이 없어서

눈 딱 감고 못 먹어도 고를 외친 것이다.

진달래꽃, 님의 침묵,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서시 기타 등등.

지금도 유명한 시를 들으면 한 구절이라도 흥얼거릴 수 있는 것은

그때의 혹독한 과제 덕분이었으니 감사해야 할 일인가?

그뿐만 아니라 청춘예찬, 신록예찬, 토끼화상 등 교과서에 수록된 글을 통째로 외웠다.

온몸을 벌벌 떨며 바람 앞의 등불처럼 심하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외우던 친구들과

미처 외우지 못한 애들에게는 사정없이 '촌 것아'를 외치던 교실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지금 하라고 하면 절대로 못할 미션이 그 당시에는 신기하게 다 외워지더라는 것이다.

내 평생 통틀어 머리가 제일 좋았던 시절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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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공포로 점철되었지만 가끔은 즐거웠던 시간은 흘러 흘러 2학년 마지막 국어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반 가수 2명에게 각각 "빛과 그림자"와 "가고파" 두 곡의 노래를 청하셔서 들으셨다.

뒤돌아 서서 눈물 지으시던 뒷모습이 지금도 아련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갈하셨다.

이 촌 것들아~~ 내가 결혼 안 한 것이 보기 좋다고 나도 결혼 안 해야지 하지 말아.

사고가 운명을 만드니

처녀 때 혼수 준비 한다고 돈 아끼며 지지리 궁상떨지 말고,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해서 나의 몸값을 높여.

이층 집에서 우아하게 홈드레스 입고 내려오며 식모-우리 시절에는 흔했다-를 부르는 내 모습을 생각하라고, 이 촌 것들아~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 타는 사람을 만나고

완행열차를 타면 완행열차 타는 사람을 만난다고

이 촌 것들아~"

눈물이 쏙 들어가는 멘트를 남기셨지만 살면서 종종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이 생각난다.

사고가 운명을 만든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에게 투자하라.

표현은 살벌했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선생님은 지금쯤 80은 족히 넘으셨을 텐데...

결혼은 하셨는지, 어디서 사시는지...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선생님, 그 촌 것이 서울에 와서 살고 있으니 이제 촌 것 아닌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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