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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향 사람일세

서울말 고향말

by 정유스티나


인류 역사상 초유의 전 세계적인 팬데믹이 무시무시한 서막의 징 소리를 울리던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학년 담임을 맡았다. 입학식은 고사하고 등교조차 못하고 한 달이 지났다.


온 세상이 막혔고 죽음의 짙은 그림자가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던 암울한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학교생활 적응 기간이 지나고 이제 교과서를 배부해야 했다. 교실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운동장에 띄엄띄엄 책상을 배치하여 반별로 교과서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모두 마스크를 썼기에 아이들은 담임의 얼굴을 모르고, 담임도 학부모와 아이들의 얼굴을 짐작만 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보라색으로 염색을 하신 마스크로도 감출 수 없는 강렬하고도 멋진 비주얼의 할머니 차례가 되었다. 수줍게 몸을 꼬는 여자 아이와 함께였다.


"음. 선영이구나. 할머니세요?"


"아이고, 우리 선생님 우리 고향 사람일세~"


"네? 할머니 저 서울말 썼는데요?"


"아이고, 겡상도 고향 맞으시구먼요."


냅다 내 손을 잡고 흔들기까지 하셨다. 나는 너무나 당황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할머니와 함께 두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면서 박장대소를 하였다.


"할머니, 저 서울말 쓰지 않았어요?"


당황하니 더 출처를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언어를 구사했지만 우리의 웃음소리만은 완벽한 서울말이었다.


그건 서울말도 아니고 사투리도 아니여~





그렇게 선영이와 할머니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선영이는 똘똘하고 예의 바르며 무엇보다 나를 너무나 좋아했다. 사실은 할머니께서 나를 더 좋아하셨다.


1주일에 딱 한 번만 출석 수업을 받는 기이한 학년을 마치고 나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다.


처음에는 1주일에 한 번씩 할머니께서 영상통화를 하셨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은 꼭 통화를 하신다.


방학 때마다 나는 선영이와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선영이 동생과 할아버지까지 함께 나오신다.


선영이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작은 선물을 사서 간다. 선영이 동생 선물까지...


할머니께서도 늘 와인을 2병씩 주신다. 남편과 함께 한 잔씩 하라신다. 울 남편은 술 한 방울도 못 마신다고 말씀드리면 그럼 선생님 다 드셔요. 와인은 몸에 좋은 보약이잖아요.


이러시면 저 다시는 선영이 보러 안 올 거예요. 반협박을 해 봐도 만나면 늘 두 손 무겁게 와인을 들고 오신다.





오늘.. 선영이와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시간 약속을 정하느라 선영이와 통화하면서 이제 5학년이 되었으니 혼자 나와도 된다고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선생님 보고 싶다고 함께 가신대요."


"응, 나도 뵙고 싶지만 힘드실까 봐 그렇지."


전화를 끊으며 내 마음도 바빠진다.


이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선물도 챙겨야겠다.


마치 친정 언니와 형부를 만나러 가는 기분으로 선물을 골랐다.


5년 전과 한결같이 보라색 염색을 하신 멋쟁이 할머니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맞아주시는 할아버지...


선영이는 1학년에서 5학년으로 훌쩍 자랐지만 우리의 시간은 멈춰 있는 것 같다.


서울말 쓰는 나에게 고향 사람이라는 팩트를 날려서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던 5년 전 그날에서.



"선생님, 사부님은 무엇을 제일 좋아하세요?"


"글쎄요? 아마도 저를 제일 좋아할 걸요?"


"아이고, 선생님. 우리 할아버지랑 똑같네요."


"흠..."


아직도 금슬마저 좋으신 두 분을 보면 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선영이는 나를 보고 선생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래, 선영이는 충분히 그 꿈을 이룰 수 있지. 그럼 선생님 후배가 되는 거네?"


"선생님, 선영이 결혼할 때도 오셔야죠?"


"아~네. 당연히 가야죠."


생각해 보면 그리 먼 날의 이야기도 아니다. 10년 안에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날을 맞이하려면 건강관리 잘해서 일단은 살아있어야 하겠지.


그때도 여전히 보라색 염색을 하신 할머니와 선영이 결혼식에서 뷔페를 먹을 것이다.


우리는 서울말이라고 믿지만 아무도 서울말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는 정체불명의 말을 쓰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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