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보다가

by 에쩨르

딸아이 산후 구완을 하면서 “이 일 끝나면 며칠 앓아야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도 아프지 않고 견뎌준 내 몸이 고마워 해 본 말이었는데 그게 입방정이었을까?

추석은 시댁에 가서 쇠겠다기에 딸네미 보낼 준비를 하다 어지러워 눕고 말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움직이기만 해도 구토가 나왔다. 간신히 딸을 챙겨 보내고 나니 몸을 뒤척이는 것도 힘들었다. 명절이 코앞이라 뭘 좀 해보려고 일어나기만 하면 다시 휘청해 누운 채로 추석을 맞았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가곡반에서 배운 노래도 듣고 머리맡에 쌓아둔 책도 뒤적거리며 추석연휴를 보냈다.

어지럼증이 조금 잡힌 것 같아 TV 리모컨을 돌리는데 재방송 채널에서 오래된 전원일기를 방영하고 있었다.

일용 처(복길 엄마)가 울고 있었다. 남동생이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데 태풍에 모두 날아가 살 길이 막막하게 된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일용이 무뚝뚝한 말투로 내뱉는다. “여편네가 재수대가리 없이 아침부터 밥상머리에서 뭔 눈물바람이여?” 그러자 숨죽여 울던 복길엄마의 눈물보가 터지고 말았다. “그래유. 재수대가리 없어서 당신 같은 남자 따라 사는구먼유. 당신이 내 속을 알어유? 하늘 아래 핏줄이라고 달랑 고거 하난디 대출받어서 시작한 농사 바람에 날려 불고 넋 놓고 있을 것을 생각하믄 내 가슴이 찢어져유. 힘이 되어주고 싶제만은 내 사는 꼴이 이러니 그럴 수도 없고 누나라고 해 줄 게 없어서 우는구만유. 재수대가리 없는 년은 맘대로 울기도 못하남유? 당신한테야 아무 상관도 없겄지만은 나한테는 한 양푼에 밥 비벼 먹고 한 이불 덮고 자란 내 동생이란 말이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일용이 아니던가. 눈물자국이 난 채 잠든 아내를 쳐다보며 잠을 못 들고 뒤척인다. 외항선 타고 밖으로 떠돌던 자신을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안주시켜 준 사람,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시어머니 모시고 부지런히 손발 놀려 살림 늘려가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새록 들고일어났다.

뒷날, 읍내에 갔다 온 일용이 한 뭉치 돈을 복길 엄마 앞에 던진다. “이거 처남 갖다 줘. 보태서 농사 자금하라고” “무슨 돈이냐? 어디서 났느냐?”며 놀라는 아내에게 “어무니 들어오시기 전에 얼른 치워라잉” 동문서답으로 일축한다. 그래도 토끼 눈을 하고 달려드는 아내에게, 당신 몰래 적금 들어 놓았던 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농협에서 대출받은 돈이었다.

TV를 보면서 나도 울었다. 한 양푼에 밥 비벼 먹고, 한이불 덮고 자랐다는 말이 내 눈물샘을 건드렸다. 나도 혈육이라곤 천지간에 달랑 둘 뿐인데...어린 시절 언니와 지냈던 일이 떠오르면서 약한 몸으로 늘 병치레를 하는 언니가 짠해 가슴이 아렸다.

남편이 힐끗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건다. “자네는 왜 또 울고 난리여?” 조심스럽게 훌쩍거리고 있는데 건드려주자 펑펑 울었다. “나도 한 양푼에 밥 비벼먹던 우리 언니 생각나서 그런다. 빼빼 마른 그 몸으로 얼마나 살지... 평생 형부 병수발만 들다 이제는 돌봐줄 사람도 없는 우리 언니... 용돈이라도 한번 주고 싶은데 돈 벌 재주도 없으니... ” 하소연이 길어지자 남편은 괜히 말 걸었다는 표정으로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뒷날, 퇴근한 남편이 한 뭉치 돈을 내 앞에 던졌다. 띠지가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백만 원 다발이다. “무슨 돈이야?” 묻는 내게 “어젯밤에 언니 불쌍하다고 울었잖아. 이것으로 처형 보약이나 한 재 지어 드리소”

"헐, 뭔 일이래? 언제부터 자기가 이렇게 속이 깊었다고? 일용이 따라 하는 건가?" 고맙다는 말 대신 물음표를 달고 남편을 쳐다봤다. 그러나 눈빛은 봄날 햇살처럼 부드럽지 않았을까? 그동안 쌓였던 미운털 하나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 함께 TV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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