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탕

by 에쩨르

내겐 오래된 무스탕이 있다. 무스탕이 막 유행할 때 샀으니 어림잡아 삼십 년도 훨씬 넘었다. 그러나 입은 것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그 무스탕은 남편과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건진 것이다.

“여보! 무스탕 하나만 사 주세요”
“아니! 정신이 있어? 없어? 그 비싼 걸 사달라니!”
이건 우리 부부의 대화가 아니다. 그 무렵 인기 절정이던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나누는 말이다. 주인공 청자는 친정어머니를 모시느라 남편 눈치를 보며 산다. 남편은 셋방살이를 면해보겠다고 세차장을 운영하면서 밤낮으로 차를 닦는다. 시간만 나면 동네 쓰레기통을 뒤져 쓸만한 물건을 주워다가 고쳐 쓰는 사람인데 느닷없이 무스탕을 사달라는 말에 도끼눈을 뜨고 아내를 쳐다본 것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살다 몇 달 전 전부터 서울살이를 하게 된 장모가 그 대화에 끼어든다.
“아니! 여보게. 그 무스탕이라는 것이 을마나 비싼 음식인지는 모르겄네만 그래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디 자, 이 돈 보태서 우리 청자 무스탕 한 그릇 사 먹이게” 하며 속바지 주머니에 옷핀으로 봉해 놓았던 파란 배춧잎 두 장을 꺼내 놓는다. 무스탕을 갈비탕이나 설렁탕 같은 음식으로 알고 있는 청자 어머니 때문에 드라마를 보던 우리는 한바탕 웃고 말았다.

마지막 뉴스가 끝나고 이부자리를 펴는데 남편이 다시 드라마 얘기를 꺼냈다.
“여자들은 그 무스탕인가 뭔가 하는 게 그렇게 입고 싶을까? 혹시 당신도 그게 입고 싶은 게 아녀?”
“당연히 입고 싶죠. 나는 뭐 여자 아닌가?”
망설이지 않고 입고 싶다고 대답을 하자 남편은 괜히 물어봤다는 듯 “쯧쯧! 여자들이란 왜 한결같이 그 모양일까? 허영에 사치에 겉만 포장하는 속물들...”

내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남자 형제만 있는 집에서 자란 탓인지 도무지 여자를 모른다. 신혼 때는 핸드백만 들어도 창피하다며 화를 내고, 립스틱을 바르면 끼 있는 여자 취급하는 바람에 다투기도 많이 했었다. 집에서 애 키우는 여자가 무슨 옷이 필요하냐며 청자 남편 레퍼토리를 그대로 따라 했다.


나는 내 남편 추레하게 보이는 게 싫어 직장에서 옷 잘 입는 남자로 만들어 내 보내는데 이 온도차라니!


나는 부잣집 막내딸로 어릴적부터 옷 잘 입기로 소문이 났었다. 언니가 양재학원에 다녀 하나밖에 없는 동생 옷을 만들었다. 세라복이며 철따라 다른 원피스를 입혀주었다. 날마다 예쁜 옷을 입고 나가야 기분이 좋은 사람인데 자린고비 남편 만나 신세 망쳤다.


그렇다고 남편 취향에 맞춰 늘어진 고무줄 바지에 비녀 꽂고 살 순 없잖은가. 싸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다 지쳐버렸다.

그렇게 기대나 미련을 버린 지 오래였는데...

연속극 사건 며칠 뒤, 남편이 한 뭉텅이 지폐를 방바닥에 툭 던졌다.
“아니 웬 돈이에요? 월급날도 아직 멀었는데?”
“무스탕인가 뭔가 그거 입고 싶다고 했잖아. 그거 하나 사”
손끝에 침을 발라가며 돈을 세어봤다. 백만 원이었다. 2년 짜리 백만 원 계모임을 할 때 였으니 엄청 큰 돈이었다. 사람은 이래서 오래 살고 볼일이다. 이런 횡재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할 뻔했는가.


‘아무래도 물건이 많은 서울이 낫겠지?’ 뒷날 당장 서울행 기차를 탔다. 백화점으로 남대문 시장 모피 상가로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다. "이게 어린양의 모피라 부드럽고 따뜻하거든요. 요즘 이거 하나는 입어줘야 옷 입는단 소릴 듣죠." 직원이 추천해 준 대로 카라와 소매 끝에 폭스털이 달린 하프코트로 결정했다.

무스탕 산 기분에 들떠 당일치기 서울여행이 피곤한 줄도 몰랐다. "무스탕이 주인 없는 야생마라는 뜻이래요." 야간열차를 타고 오는데 직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럼 나도 이 옷 입고 고삐 없는 무스탕처럼 싸돌아다녀볼까나?" 생각하니 웃음이 픽 나왔다. 자유부인이라도 된듯 마음까지 싱숭생숭했다.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올 겨울은 제발 바람 쌩쌩 부는 추운 날만 계속되라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 해 겨울은 왜 그리 따뜻한지 도무지 무스탕 입을만한 날이 오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무스탕이 입고 싶어 안달이 난 나는 첫눈이 팔랑팔랑 내리던 날, 무스탕을 걸치고 일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저녁이 되어 집에 오니 이게 웬일이람! 눈송이가 내려앉은 곳마다 얼룩이 져있지 않은가! 무스탕이 처음이라 정보가 없었다. 동물 애호가들이 모피 옷 만드는 것을 반대하자 꾀 많은 장사꾼들이 가죽을 뒤집어 만든 옷이 무스탕이다. 털이 밖으로 나오면 눈비에 강한데 진피를 밖으로 돌렸으니 물기를 흡수하지 못한다. 세탁소에 가져갔더니 드라이클리닝 값이 웬만한 옷 한 벌 값이다.

간신히 사랑땜만 했는데 무스탕이 싫어졌다. 날이 추워도 드라이 값을 생각하면 무스탕을 즐겨 입지 않게 된다.

살 때는 기분에 들떠 몰랐는데 해가 지날수록 무스탕이 무겁게 느껴졌다. 비싼 옷이라는 말에 무스탕을 걸쳐보던 어머니도 한소리 했다. "오메, 무거서 이것을 으찌게 입고 댕긴다냐. 밥 한 그릇 묵고는 안 되겄다. 옷에 눌려 죽겄다야."


그렇게 무스탕은 장롱지기가 되었다. 몇 십년째 그 자리에 걸려있는 무스탕을 보며 남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입고 싶다던 무스탕은 왜 걸어만 두고 보는 거야? 설마 아끼는 건 아니겠지? 열심히 입으라구. 그래야 또 여우탕을 사든 밍크탕을 사든 할거 아냐? 쯧쯧! 그 변덕을 누가 말려!”

남편 말대로 나도 어쩔 수 없이 변덕 많은 여자임을 부정할 수 없어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나저나 저 놈의 무스탕 때문에 밍크탕 사기는 다 틀렸다.

작가의 이전글백수와 우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