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재활용

장기 기증

by 에쩨르

내 지갑에는 주민등록증과 함께 장기기증등록증이 들어있다. 만일에 대비해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 사고가 나면 빠른 시간 내에 병원과 연락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999년에 신청했으니 1세기 전이다. 장기기증을 결심하게 된 것은 한 편의 시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장기기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자막을 통해 소개된 그 시를 본 순간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로버트 테스트

ㅡ언젠가는 주치의가 나의 뇌기능이 정지했다고 단정할 때가 올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나의 목적과 의욕이 정지되었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때 나의 침상을 죽은 자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산자의 것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나의 눈은, 해질 때에 노을을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얼굴과 여인의 눈동자 안에 감추어진 사랑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에게 주십시오. 나의 심장은, 끝없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주십시오. 나의 피는, 자동차 사고로 죽음을 기다리는 청년에게 주어 그가 먼 훗날 손자의 재롱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신장은, 혈액 정화기에 매달려 삶을 영위하는 형제에게 주시고 나의 뼈와 근육 섬유와 신경은, 다리를 절고 다니는 아이에게 주어 걷게 하십시오. 나의 뇌세포를 도려내어 말 못 하던 소년이 함성을 지르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소녀가 그녀의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듣게 하여 주십시오.

그 외에 나머지 것들은 다 태워서 재로 만들어 들꽃들이 무성히 자라도록 바람에 뿌려 주십시오. 당신이 뭔가를 매장해야 한다면 나의 실수와 약함을, 나의 형제들에 대한 편견을 매장해 주십시오. 나의 죄악들은 악마에게, 나의 영혼은 하나님께 돌려보내 주십시오. 우연한 기회에 나를 기억하고 싶다면 당신들이 필요할 때 나의 친절했던 행동과 말만을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부탁한 이 모든 것들을 지켜준다면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 순간,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 열정이 끓어올랐다. 곧바로 화면에 뜬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갖춰야 할 서류가 여러 가지였다. 가족들의 동의서와 본인의 유언장, 등록증에 첨부할 사진이며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주민등록등본도 필요했다. 본인은 기껏 좋은 생각으로 결정했는데 나중에 유족들이 고인의 뜻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있어서 가족들의 동의서와 유언장을 받아 둔다는 것이다.

당장 가족 동의서 받는 일이 어려웠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장기기증에 대해 설명하며 엄마의 뜻이 이렇다고 얘기를 했더니 금방 사인을 해 주는데 문제는 남편이었다. 부모님이 주신 몸을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느냐, 나는 당신과 우리 선산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묻힐 거라면서 절대 허락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동의를 하든 말든 내 몸 내 맘대로 할 거라고 큰소리를 쳤는데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아 부드럽게 사정하고 끈질기게 애원했다. 그렇게 설득시킨 지 두 달 만에 반 강제로 동의를 받아냈다.

유언장을 써 본 것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대면해 보니 식구들이 더 애틋했다. 유언장을 쓰며 숙연해 있으니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녀석이 “엄마 이제 죽는 거야?” 하고 묻는 바람에 울다가 웃기도 했다.

그 일에 관심을 갖고 보니 전에는 몰랐던 일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뇌사 상태가 되었을 때 장기기증을 하면 9명 이상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단다. 골수 기증은 백혈병이나 악성 혈액질환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있고, 사후에 뼈를 기증하면 교통사고나 병으로 손상을 입은 환자들의 재건과 선천성 기형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또 해부학 실습을 할 때 외국에서는 시신 1구당 3명이 실습을 하는데 우리나라는 수십 명이 모여 실습을 하게 되니 의학 발전이 늦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교사상이 깊어 시신 기증을 하지 않으니 해부학용 시신을 수입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각막에 관한 것이었다. 각막은 심장박동이 멈춰도 6시간까지 살아있다. 안구를 덮고 있는 얇고 투명한 막인데 사진기의 렌즈처럼 빛을 통과시켜 보게 한다. 투명함을 유지하기 위해 혈관이 없는데 눈물로 산소 공급을 받는단다. 오, 하나님의 창조, 인체의 신비함이여! 맑은 눈을 위해 가끔 울어야겠구나.

우리나라 장기 기증 신청자는 OECD 국가 중 제일 낮다고 한다. 5만 명이 넘은 사람들이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고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다. 시각 장애인이 26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중 각막기증 대기자는 2천 명이 넘는데 대기자는 늘고 기증자는 줄어 그 간격차가 점점 커진다고 한다.

딸아이 어릴 적에 노란색 원피스를 사 준 적이 있다. 그 옷을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예쁘다고 쳐다보곤 했다. 주변에 아이 키운 엄마들이 서로 그 원피스를 물려달라고 줄을 섰었다.


장기기증 등록을 하고 나서 문득 그 일이 떠오르곤 한다. 잠시 입을 옷도 물려주는데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장기가 그대로 묻힌다면 얼마나 아까운가!


뼈나 각막, 시신은 사후에야 기증이 가능하다. 죽은 뒤에 남은 것으로 다른 사람이 뛰기도 하고 보기도 한다는데 그것조차 못할까? 누군가의 몸속에서 내 작은 부분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 이거야말로 네버엔딩 아닌가. 장기기증이야 말로 가장 숭고한 나눔이며 아름다운 재활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땅에 살면서 내 식구 챙기는 일 밖에 한 게 없는데 마지막 떠나는 길에 생명의 씨앗 하나 심고 싶다. 한번 왔다 한번 가는 인생, 나의 마지막 길이 누군가의 생명길로 이어진다면 죽음 또한 섧지 않으리.

누군가에게 물려준다고 생각하니 내 몸이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무심코 켜 놓았던 텔레비전도 끄게 되고 음료수 한 잔도 가려 마신다.


문득 아들이 묻는다. "엄마! 무덤이 없으면 우리는 엄마 보고 싶을 때 어디로 가요?"

"무덤에 가면 엄마가 보이니? 내 영혼 이미 그 좋은 낙원에 있을 텐데..."


몆 년 전, 사전의료 의향서 작성도 했으니 죽음 준비 다 끝났다. 이제 한 가지 소망은 소프트 랜딩이다. 줄 것 다 주고 한 잎 낙엽처럼 가뿐하게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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