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의 부산 여행

행복 여행

by 에쩨르

삼대의 부산 여행

“우리 부산으로 여행 갈 건데 엄마도 내려오세요. 산모가 바람 쐬고 싶대요.” 목포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헐, 이게 뭔 소리? 손자 태어난 지 두 달, 산후 조리 해주고 며칠 전에 올라왔는데 목도 가누지 못한 신생아를 데리고 여행이라니! 이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 손은 벌써 여행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수원에서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도심을 벗어나자 정겨운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원근을 달리하는 산들, 산 아래 옹기종기 터를 잡은 마을들... 처음으로 기차를 탔던 유년의 추억도 풍경 위로 겹쳤다.


부산 역에 내리니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메, 이쁜 내 강아지들!” 물고 빨고 돌리고 쭈니, 또리, 하니를 껴안고 요란한 인사를 나눴다. 하니는 그동안 부쩍 살이 올랐다.


밥 먹기 전에 한 군데 둘러보자며 태종대에 올랐다. 등대 꼭대기에 앉아있는 갈매기, 숲을 환하게 밝히는 적송, 물속에서 솟은 바위, 반질반질 잎이 무성한 아웨나무, 포말을 일으키며 달리는 배... 구름은 한가로이 노닐고 바람은 바다에 스쳐 잔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이른 저녁을 먹으려고 자갈치 시장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고소한 냄새가 달려 나와 손님을 맞는다. 몇 년 전 딸과 함께 부산에 왔다가 이곳 생선구이에 반해서 임명장 없는 홍보위원이 되었다. 며느리는 생선을 발라 애들 먹이느라 바쁜데 아들은 자꾸 내 밥 수저 위에 올려놓는다. 그만하라고 밀어내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다. 오늘도 모듬구이 한 접시를 싹싹 비웠다.


해운대 리조트에 짐을 풀어놓고 밤경치를 보러 나왔다. 지는 해와 뜨는 달이 어우러지는 시간, 화려한 광안대교의 불빛을 뒤로하고 방파제를 따라 해운대로 향했다. 하늘 향해 수직으로 자란 빌딩들, 흡사 다른 지구별에 온 것 같다. 쭈니와 또리는 신발을 벗고 파도와 술래잡기를 한다. 더 놀겠다는 걸 밤바람이 차서 나오게 했더니 불평이 길게 이어진다. 아들 내외는 데이트 가고 애들을 씻기려는데 또리가 소리친다. “할머니! 빨리 와 보세요. 하니가 예수님 됐어요.” 방문을 열어보니 애기가 팔다리를 열십자로 뻗고 잠이 들었다. 온종일 차에서 시달려 피곤했나 보다.


뒷날 새벽 애들 깰세라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하늘과 바다가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방파제를 따라 걷는데 진회색 구름 띠가 밀려나면서 주변이 온통 환해졌다. 황갈색에서 주황으로 바뀐 바다에서 황금빛 불덩이가 솟아올랐다. 해 꼬리가 황옥공주 인어 상을 어루만지자 갈매기들도 시샘하듯 날아들었다. 하늘과 바다가 같은 색으로 소용돌이치며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왔다. 우와! 우와! 생애 처음으로 해를 맞는 것처럼 감탄사 백번쯤 날렸다. 인생은 숨 쉰 횟수가 아니라 숨 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을 얼마나 자주 누렸는가로 평가된다고 했던가. 한 번을 봐도 평생 잊히지 않는 풍경이 있다는데 오늘 해돋이가 그랬다.

데크길을 따라 동백섬을 향해 걸었다. 낮은 해조음이 깔리고 아침 햇살을 받은 해국이 연보라색으로 빛난다. 초록 숲에서 분홍색이 보이자 가슴이 뛰었다. ‘설마 동백?’ 했는데 역시나 동백이었다. 애기동백이 분홍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어머, 어머, 이게 뭐야? 벌써 피었어? 나 올 줄 알고 서둘러 나온 거야?” 민낯이라는 것도 잊고 애기 동백 옆에서 셀카를 찍고 또 찍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에 엔도르핀이 마구마구 분비된다. 이번 여행, 여기서 마쳐도 아쉽지 않을 것 같다.


주변을 더 둘러볼 참인데 휴대폰이 울린다. “엄마! 방에서도 해돋이 볼 수 있는데 왜 찬바람 쐬고 그러세요? 들어오세요. 밥 먹어야죠” “해돋이를 방에서 보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리고 풍경을 많이 먹어서 배 안 고프다.” “나는 위장을 채워야 행복한데 엄마는 눈만 채우면 되는구먼요. 동상이몽입니다.”


아침 식사 후 자동차에 올랐다. “웃음도 전염되고 짜증도 전염되니까 여행 중에는 웃음만 전염시키자. 그리고 휴대폰은 할머니가 보관할 거야.” 요즘 메신저에 빠진 쭈니가 불만을 토하려다 분위기에 눌려 애써 참는다.


오전 일정은 감천 마을이다. 목포 온금동과 닮았다며 선생님이 부산에 가면 꼭 들러보라고 했단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쭈니가 감천 마을의 유래를 메모한다. 기특한지고! 할미 눈에는 그런 것도 예뻐 보인다. 다닥다닥 붙은 집을 보며 또리가 묻는다.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았대요?” “야, 이 바보야. 좋아서 살았겠냐? 전쟁 때문에 피난 와서 어쩔 수 없이 살게 된 거지” 오빠 말에 또리가 눈을 흘긴다. “모를 수도 있지. 그렇다고 바보라고 하면 돼?” 그 뒤로도 한참 동안 현실남매의 말싸움이 이어졌다.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을 걸으며 마을의 속살을 보니 생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골목 아래 평상에 할머니 몇 분이 앉아있다. 두고 온 고향, 지나가버린 청춘을 풀어내시는 걸까? 정오의 햇살이 할머니들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오후에는 오륙도를 내려다보며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햇빛은 달콤하고 바람은 상쾌하다. 갯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파도에게 들려주었다. 농바위 오르는 길에서는 내 숨소리도 거칠게 뛰었다. 농바위는 언제부터 저기에 서 있었을까? 수 만년 세월을 버티고 있는 바위가 사뭇 장엄해 보인다. 도시의 소음에 찌든 귀가 바람에 맑게 씻긴 것 같다.


저녁은 삼겹살이다. 엄마 단백질 부족하다며 밥 수저에 올려주는 아들을 보며 퀴즈를 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는?” 쭈니는 오겹살, 또리는 치마살, 며느리는 등심, 제 각각 답이 나왔는데 젓가락으로 국그릇을 땡 쳤다. “정답은, 아들이 구워주는 고기입니다.” 눈치 빠른 또리가 얼른 답을 고친다. “아빠가 구워주는 고기요” 그렇게 이른 저녁을 먹고 태양이 달아준 긴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왔다. 손주들의 재롱에 꿈같은 밤이 깊어간다.


잠든 하니를 안고 둘째 날 일정이 시작되었다. 쭈니의 요청으로 해동용궁사로 향했다. 바닷가에서 가장 가까운 절이라며 친구들이 추천했단다. 파도가 치면 법당까지 물이 튀는지 꼭 보겠다는 것이다. 차를 세우고 들어가는데 입구에서 젊은 아낙네가 맛있는 씨앗호떡 있다며 불러 세웠다. 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식성 좋은 쭈니가 입맛을 다신다. 하나에 2천 원이라기에 2개를 사서 애들 손에 들려줬다. 조금 걸어가니 양쪽에 늘어선 포장마차마다 씨앗호떡을 파는데 한 개에 천 원이란다. 아무리 덤터기를 씌워도 그렇지 배나 더 받다니! 놀라고 있는데 쭈니가 “할머니, 호떡이 핸드백 됐어요.” 하며 달랑달랑 들고 오는 게 아닌가! 긴 머리카락이 말려 손잡이가 되어 있었다. ‘비싼 호떡에 머리카락까지?’ 돌아오는 길에 들렀는데 머리카락이 든 호떡을 보고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 호객행위 할 때는 언제고 막보기로 대하다니, 여행지에서 만난 한 사람이 그 도시를 대표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서둘러 보수동으로 이동했다. 책으로 벽을 쌓은 골목을 돌아보며 쭈니는 “만화로 보는 세계사”를 사고 책에 관심이 없는 또리는 젤리처럼 투명한 물방울 떡을 물고 다닌다. 없는 게 없다는 깡통 시장에서 나는 체크무늬 목도리를, 며느리는 달걀호떡을, 국제시장을 재미있게 봤다는 아들은 꽃분이네 가게 앞에서 인증 샷을 찍는 것으로 시장 투어를 마쳤다.


애들은 차에서 쉬고 나 혼자 초량 교회에 들렀다. 이바구길을 걸어 올라가니 소나무 한 그루 담장 위로 가지를 길게 뻗었다. 한강이남 최초의 교회, 피난민들과 구국기도회를 열고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곳, 주기철 목사님께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했던 곳... 벽에 붙은 백 년의 역사를 읽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168 계단을 올라 김민부 전망대를 돌아봤다. “기다리는 마음” 노랫말을 쓴 김민부 시인을 기려 만든 곳이란다. 멀리 보이는 게 남항대교라는데 날씨가 흐려 우련하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바람에 노래 한가락을 실려 보냈다.


애들은 하루 더 머문다는데 나는 일정이 있어 먼저 올라오게 되었다. 역으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 또리를 힘껏 껴안았다. “아, 숨 막혀! 할머니는 왜 계속 나를 안고 있어요?” “너를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이제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지 모르니까 행복을 충전시키는 거야.” 속 깊은 며느리가 손가방에 슬쩍 봉투 하나를 넣어준다. 눈도, 배도, 지갑도 빵빵해 포만감 지수 최고를 찍은 것 같다. 휴대폰 노트에 짧은 메모를 남겼다. “삼대 여행이라 쓰고 행복 여행이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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