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아버지
아버지는 늘 밖으로 나돌다 가끔씩 들른 손님 같은 분이었다. 딸이라는 이유로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면서 아들 보겠다고 첩을 거느리고 엄마 눈에서 눈물을 뺐다.
‘딸은 왜 필요 없을까? 필요 없는 딸은 왜 낳았을까?’ 내 반골기질은 순전히 아버지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턱없이 조숙해져서 아들을 선호하는 잘못된 가치관과 싸우다 서둘러 결혼을 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고희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돈, 힘, 다 떨어지고 병까지 얻은 몸이었다. 지푸라기 하나, 흙 한번 물어다 붙인 적 없으면서 어찌 당신의 둥지라고 생각했을까? 다 늙어 당신 곁에 눌러앉은 아버지를 감지덕지 보듬어안은 어머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데면데면 몇 년을 지냈는데 어느 날 모이라고 연락이 왔다. 돌아가시려나 싶어 학교에 있는 애들까지 데리고 급히 기차를 탔다.
집에 들어서자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두 기둥 사이에는 흰 광목천에 “용서를 빈다.”는 글이 씌어 있고, 마루에는 떡, 고기, 생선, 잡채...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회갑 칠순 다 지났는데 무슨 일이람?’ 짜증 섞인 물음표가 터져 나왔다. 언니들도 이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용서를 빌라고 그란다. 사방 천지를 돌아다녀봐도 너희들만큼 귀중한 것이 없는 것을, 어째서 그렇게 매정하게 했는가 모르겠다. 애비가 필요할 때 옆에 없었던 것도 미안하고, 큰소리치고 매질했던 것도 죄송하다. 어떻게 해야 너희 속에 있는 홧덩이가 풀리겠냐?” 아버지가 식구들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으며 읍소했다.
왜 급히 집합을 시켰는지 궁금하던 차에 그 황당한 몸짓이 적이 당황스러웠다. 큰언니가 귀에 대고 말했다. “죽을 때가 되니 노망 났는갑다야.” 대책 없이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아팠던 얘기를 나누며 눈물로 밤을 보냈다.
“사과(謝過)는 과거를 풀고 용서는 미래를 연다.”는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모질지만 약한 것이 사람 마음일까? 황당하고 생뚱맞은 사과였지만 우리 자매들에겐 대단한 사건이었다. 아버지의 진심 어린 눈물에 꽁꽁 얼었던 응어리가 녹아내렸다. 그 뒤로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런 아버지가 만만해 일부러 시비를 걸어도 화를 내지 않았다. 고작 귓등에 꽂아 둔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이 대꾸였다.
사과 잔치 뒤로 지병인 파킨슨병이 점점 심해졌다. 병구완에 지친 엄마를 두고 볼 수 없어 우리 집으로 모셔 왔다. 우후죽순처럼 요양원이 늘어날 즈음인데 부모님은 자식 옆에서 생을 마치기를 원했다.
정기적으로 나가던 모임 몇 개를 접었다. 밥, 설거지, 청소, 빨래, 장보기, 목욕... 손에 물마를 새가 없어 주부습진을 달고 살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는데 아버지가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치매는 벼락처럼 찾아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방청소를 하는데 쓰레기통에서 통장이 나왔다. 기천만원이 들어있는 예금 통장이었다. 아들이 없어서인지 마지막 보루처럼 꼭꼭 숨기고 있던 것을 쓰레기 취급을 한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구나’ 나는 한동안 우두망찰 서 있었다.
정기적으로 다니던 대학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파킨슨이 깊어지면 치매가 온다고 했다. 별다른 치료법이 없다는 말만 듣고 돌아왔다.
벽에 똥칠한다는 속담이 현실이 되었다. 언뜻하면 기저귀를 빼고 변을 숨겼다. 세탁기를 몇 번씩 돌리고 닦고 털어도 소용이 없자 결국 가구까지 들어냈는데 서랍장 밑에서 굳은 변 덩이를 찾아냈다.
날이 갈수록 관절이 뻣뻣하게 굳어지니 밥 먹이는 일이 힘들어졌다. 팔이 로봇처럼 움직여 밥알이 사방으로 튀고 김치가 벽에 붙기 일쑤였다. 식구들이 달라붙어 팔을 붙잡고 밥을 먹였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몸을 놓아버리니 씻기는 일도 어려웠다. 이불에 눕혀 목욕탕까지 끌었다. 아버지의 하체를 보는 일보다 민망한 일이 또 있을까? 처음엔 눈을 다른 데 두고 대충 씻겼는데, 볏짚처럼 가벼워진 몸을 만지다 보니 연민이라는 감정이 돋아났다. ‘여러 여자 섭렵했으면서 왜 원하던 아들 하나 못 뒀을까?’ 애잔한 마음마저 들었다.
겨울이 지나고 새 봄이 왔는데 아버지의 기력은 점점 떨어졌다. 정신줄은 놨어도 딸네미 손길이 부드러워졌다는 걸 느끼셨을까? 수발드는 일에 이력이 붙어 갈 즈음, 여든을 넘긴 겨울에 아버지는 생의 문을 닫으셨다.
의무를 다한 사람은 얼마나 떳떳한가. 아버지 모시느라 고생했다는 칭찬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도와줄 사람 없이 장례를 치르느라 정신이 없어 울지도 않았다.
유품을 정리하는데 아버지 즐겨 보시던 책 속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비뚤비뚤했지만 눈에 익은 아버지 글씨였다. “금덩이 같은 내 막둥아. 애비 노릇도 제대로 못했는데 내 말년을 보듬어줘서 고맙다...”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장례식 때도 눌렀던 통곡이었다.
어느 정신 맑은 날 쓰신 걸까? 그 몇 줄의 글이 눈물샘을 건드려 버렸는지 시도 때도 없이 목울대가 아팠다. ‘아! 나도 금덩이 같은 자식이었구나!’ “금덩이 같은 내 막둥이”라는 말은 "쓸데없는 계집애"라는 오래된 상처에 반창고가 되어주었다. 존재만으로도 큰 버팀목이던 아버지, 닮고 싶지 않아 몸부림쳤지만 결국 내 삶의 연출자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영면하신 지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일찍이 가묘를 써놓고 틈만 나면 거기 앉아계시더니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누우셨다. 생을 달리해도 끝나지 않은 것이 부모자식지간일까? 왜 회한은 돌이킬 수 없을 때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자식 노릇 못했다는 자책을 하기 싫어 부모님을 모셨는데 남은 것은 후회뿐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행가 가사가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올 줄 몰랐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이 치매라지만 정작 어리석은 것은 자식들이 아닌지 모르겠다.
추석 전에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잡풀을 뽑으며 생전에 못했던 말을 털어놨다. “아버지! 사과 잔치를 열어 원망을 풀어주시고, 금덩이 같은 내 막둥이라고 자존감을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지막 이별연습을 막내딸과 함께 해 주신 것도 감사해요. 사랑합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