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 가드너

by 에쩨르

"게릴라 가드너?" 단어에서 파생된 이미지 때문인지 처음 그 말을 접했을 때 기습이나 파괴라는 느낌이 겹치면서 조금 뜨악했었다. 그런데 뜻을 알고 나서는 그 수상한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졌다.

게릴라 가드너는 총이나 칼 대신 꽃을 들고 싸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밀리에 모여 도시를 울긋불긋 물들인다. 게릴라들의 습격으로 콘크리트 땅이 꽃밭으로 변한다. 자투리땅을 초록으로 탈바꿈시키고 쓰레기장도 꽃으로 점령해 버린다.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소공녀도 게릴라 가드너다. 주변의 공터에 꽃을 가꾸며 사진을 올리는데 일상을 엿보다 보니 슬며시 따라쟁이가 되고 싶었다. ‘멋진 사람들 흉내를 내다보면 어느 순간 닮지 않을까? 그런데 어디를 습격하지?’ 반란을 일으킬 장소를 물색하느라 며칠 두리번거렸다.

산에 오르다 보니 오거리 아웃도어 매장 앞에 빈 고무 통 세 개가 보였다. 주차방지용으로 놓아둔 것 같은데 통마다 쓰레기가 수북했다. ‘옳거니! 저곳을 점령하자’ 생각을 굳히고 나니 거사를 앞둔 사람처럼 비장해졌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마라/ 네가 피고 나도 피면 온통 꽃밭이 아니겠느냐” 조동화 님의 시를 읊으며 작전 개시할 날을 별렀다.

날이 풀리자 시장에 꽃모종이 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점령하고 싶어 곧바로 일일초와 임파첸스 모종, 그리고 부사토도 한 봉지 샀다. 임파첸스와 일일초 그 둘은 모양, 색, 크기, 피는 시기도 비슷하다. 다섯 장 홑잎으로 꽃 진 자리에서 다시 꽃이 핀다. 그렇게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봄부터 가을까지 줄곧 색색깔의 웃음을 선사한다. 꽃을 보며 좋아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미리 즐거웠다.

게릴라전은 몰래 하는 법, 사람들 왕래가 뜸한 새벽에 모종을 들고 나섰다. 날씨까지 부윰한 것이 일을 치르기에 제격이었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오느라 어깨가 뻐근했다.

쓰레기를 치우는데 온갖 잡동사니가 다 나왔다. 깨진 소주병에 손이 찔려 피가 흘렀다. 뭐가 묻었는지도 모를 휴지를 주워 손가락에 감고 담배꽁초를 파냈다. "술과 담배도 사회악에 추가시켜야 돼!" 구시렁대며 30분 넘게 쓰레기와 씨름했다.

흙을 고르게 편 다음 부사토를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 물을 뿌려주며 ‘잘 살아라, 예쁘게 피어라’ 주문을 외웠다. 누가 누가 더 예쁘나 시새워 필 것이 보여 내 얼굴에 먼저 웃음꽃이 피었다.

당분간 물을 주러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비가 내렸다. 고것들 뿌리 잘 내리겠다 싶어 눅눅한 날씨도 싫지 않았다.

비가 개자 곧장 달려 나갔다. "그동안 얼마나 자랐을까?" 가게가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첫사랑 연인을 만나러 갈 때 이랬었던가? 오랜만에 느껴 본 신선한 흥분이었다. 잔뜩 기대하며 모퉁이를 돌아서다 그 자리에 서 버렸다. 고무 통 세 개가 모두 비어 있지 않은가. 푸른 잎사귀 하나 보이지 않고 깨진 맥주병과 담배꽁초, 찢어진 러닝셔츠 위로 토사물만 쌓여 있었다.

누가 그랬을까? 공중부양이라도 할 것처럼 들떠서 왔는데 순간에 맥이 풀렸다. 한참을 주저앉았다가 돌아와 그대로 누워 버렸다. 양쪽 뺨 위로 허탈이 흘러내렸다.

며칠 허우룩하게 지내다 보니 오기가 생겼다. ‘게릴라 근성이 뭔가? 끈질긴 도전 아닌가? 아름다운 공격을 멈출 순 없지. 내 기어코 그곳에 꽃을 피우고 말리라!’ 다시 결전의 날을 잡았다. 내 의지를 고무시켜 주려는 듯 우리 집 화단에서 일일초, 크로커스, 비비추 새순이 쑥쑥 올라왔다. 며칠 뒤 꽃모종을 솎아 들고 다시 나섰다. ‘뽑으면 또 심지 뭐!’ 실망할 준비도 단단히 했다.

모종을 심은 뒤 작은 팻말을 꽂았다. “저를 뽑지 마세요. 눈을 즐겁게 해드릴게요.”

틈나는 대로 모종을 지키러 다녔다. 집에서 20분 왕복 40분, 운동하는 셈 치고 부지런히 다녔다. 종이컵에 심은 꽃을 가게 앞에 살짝 놓아두는 꽃튀를 하다 보니 걷는 일도 즐거웠다. 어린 모종의 부탁이 사람들 가슴에 닿았을까. 모종은 튼실하게 뿌리를 내렸다.

날마다 페트병을 들고 와서 물을 주는 것을 보고 가게 사장님이 나오셨다. 몇 년째 쓰레기가 쌓여있는 고무통에 꽃모종이 심겨 있어서 어느 단체에서 한 일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게릴라 가드너 얘기를 했더니 고맙다며 믹스 커피 한잔을 타 주셨다.

내 사랑과 정성을 마신 모종은 쑥쑥 자라 꽃이 피기 시작했다. 옷을 사러 나왔던 사람들은 가게 앞에 핀 꽃들과 먼저 눈을 맞췄다. 사람 왕래가 빈번한 곳이라 지나가는 분들도 꽃을 쳐다봤다.

그해 봄부터 가을까지 내 산책 코스는 오거리였다. 남의 땅에 깃발 꽂고 흐뭇해하는 정복자처럼 점령지 돌아보느라 걸었을 뿐인데 가을 끝무렵 그들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 꽉 쪼이던 원피스가 헐렁해지고 그 속에서 바람이 술래잡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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