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회사에서 직원 채용이 있었다. 공고가 나가자 청년실업 대란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이력서를 냈다. 그중에 면장 아들도 있었다. 직원 채용이 이사회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면장은 이사들을 집으로 불러 물밑 작업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시댁이 있는 마을의 유씨네 아들도 이력서를 냈다. 유 씨는 타지에서 들어와 김 씨 집성촌에 뿌리를 내린 사람이다. 밭뙈기 한 평 없어 남의 염전에서 일하는 염부였지만 착실하게 가정을 꾸려갔다. 조금 어눌해 보이는 아내를 살갑게 건사하는 모습도 좋아 보였다. 어떻게 하든 자식들은 염부 만들지 않겠다고 밤을 낮 삼아 일을 했다.
아이들은 인사성 좋은 데다 공부도 잘했다. “저런 부모 밑에서 어찌 저렇게 영특한 애들이 나왔을까?” 사람들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자 유 씨는 “우리 큰놈이 국립 대학교에 들어갔다”며 마을 회관에서 막걸리를 샀다.
염전 일이 힘에 겨웠을까? 뙤약볕에서 소금을 긁던 유 씨가 쓰러졌다. 병명도 모른 채 며칠 만에 생명 줄을 놓아버렸다. 그 아내는 넋이 빠져 슬픔을 모르는 사람처럼 울지도 않았다. 사회성 없는 엄마와 줄줄이 크고 있는 동생들이 큰놈 어깨 위에 올려졌다. 세상 물정 모르는 큰놈이 학생 신분으로 이력서를 낸 것이다.
남편이 서류심사를 하는데 큰놈이 자필로 쓴 자기소개서를 첨부했더란다. 자신이 처한 형편과, 합격하면 열심히 일하겠다는 다짐을 적었는데 반듯한 글씨와 호소력 있는 문장에서 진심이 느껴지더라고 했다.
승산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는지 다른 사람들은 이력서를 내놓고도 별반 기대하지 않았는데 상황이 절박했던 큰놈만 희망을 걸고 있었다. 나중에는 면장 아들과 큰놈, 두 사람으로 좁혀졌다.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회사 실무진으로 표를 행사할 권리가 있는 남편은 고심했다.
남편을 통해 그 일이 되어가는 과정을 듣고 있던 나도 부쩍 관심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큰놈에게 훈수를 두고 싶었다. “그 자리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 역전승이 재밌지 않나? 나 같으면 큰놈 손을 잡아주겠다. 그 일 성사시키면 자기 퇴직 말년에 홈런 치는 거야” 슬쩍 한마디 던졌다.
내 의도가 적중해서 남편의 승부욕에 제대로 불이 붙었다. 투표권이 있는 이사들을 만나 큰놈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직원이 사고를 치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남편은 그 아이와 사돈의 팔촌도 아니면서 보증인을 자청했다.
평생 허리 굽히지 않던 사람이 발품 팔아가며 굽실거리는 모습이 이사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투표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큰놈의 승리였다.
남편은 자기 아들이 취업이라도 한 듯 좋아했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아서인지 엔도르핀보다 강한 호르몬이 온몸에 흘렀다.
그렇게 큰놈은 취직이 되었다. 졸업반이었던 녀석은 몇 달 남은 학사일정을 조절해 실습에 들어갔다. 자칫 어려움에 처할 뻔했던 한 가족에게 살아갈 길이 열렸다. 그 아버지의 소원대로 와이셔츠 입고 펜대 굴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큰놈이 업무에 익숙해질 무렵, 남편은 그 아이에게 바통터치 하듯 30년 회사 생활을 마쳤다. 직원으로서 최고봉에 오른 데다 명예로운 퇴직이었다.
마지막 퇴근하던 날, 자동차에서 짐을 빼는데 트렁크에서 무게감 있는 비닐봉지가 보였다. 생굴이었다. 웬 거냐고 물었더니, 큰놈 엄마가 가져온 거라고 했다. 밖에 나오니 그 엄마가 검정 봉지를 들고 자동차 옆에 서 있더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얼굴은 옆으로 돌린 채 “이거 사모님 갖다 주시오” 그 한마디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아들 취직하는 데 힘을 실어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갯벌에 나갔던 모양이다. 가끔 시댁에 갔다가 길에서 몇 번 마주쳤지만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말 한번 건네 본 적 없지만 왠지 속 깊은 사람으로 여겨졌었다.
여느 사람들처럼 의례적인 전화 한 통 할 줄 모르지만 굴 한 그릇에서 그 엄마의 진심이 느껴졌다.
풋마늘 썰어 넣고 깨 듬뿍 뿌려 굴을 무쳤다. 너무 잘아 젓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지만 맛은 그만이었다. 굴 무침을 먹으며 기도했다. 큰놈이 월급 받아 동생들도 공부시키고 착한 여자 만나 가정도 꾸리고 그 어머니도 잘 모시기를.
문득 큰놈의 근황이 궁금해 시골에 있는 형님께 물었더니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경석이? 으찌께 착실한가 회사나 동네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다네. 머시마가 붙임성도 좋고 낯깔도 좋더라고. 딸 가진 사람들이 서로 사위 삼고 싶다고 입맛 다신당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