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쩨르

내 인생의 단어

by 에쩨르

전쟁 후에 태어난 여성 중 가슴에 응어리 하나쯤 없는 사람 있을까.

아들 바라는 집에서 딸로 태어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쓸데없는 계집애”였다. 동네 사람들도 나만 보면 "쯧쯧, 고추 하나 달고 나오지..." 하며 혀를 찼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송골송골한 액이 흘러나오는 애호박 같은 여린 가슴에 자꾸 눈물이 고였다. 쓸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상장으로 도배를 해도 돌아온 건 여전히 "계집애 공부 잘해봐야 쓸데없다" 는 말이었다. 나는 점점 겁 많고 말 없는 아이가 되었다. ‘쓸데도 없는데 나는 왜 태어났을까? 쓸데없는 딸은 왜 낳았을까?’ 물음표를 달고 살았다.

사춘기가 되자 그 말이 점점 크게 들려 ‘쓸 데도 없는데 콱 죽어버려?’ 반항심이 들끓었다.

파출소 빠져나오니 경찰서 마당이었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한술 더 떠 “여자가 왜 그 모양이냐? 감히 여자가!” "여자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여자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딸을 업신여기는 부모에게서 벗어났으나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더 늘었다.

꽃, 달, 별, 비, 노을, 단풍, 낙엽을 좋아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내 하는 일은 다 쓸데없는 짓이라며 빈정댔다. 쓸모와 쓸모없음의 경계는 누가, 무엇에 기준을 두고 정의하는 걸까. 창조주의 작품을 찬양하고 감탄하는 것이 인간됨의 본분 아닌가. 난 지금껏 그 쓸데없다는 무용의 힘으로 살아왔다.

애들을 키우다 보니 부모님의 편견이 더 이해되지 않았다. 딸 아들 똑 같이 귀한 생명인 것을 어찌 그리 차별했을까. 내 안에 있는 무수한 재능을 딸이라는 이유로 사장시켜 버린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원망스럽다.

이조 오백 년이 끝났는데도 내 주변 남자들 머릿속엔 여전히 경국대전이 들어앉아 있는 것 같다. 여권 운동가라도 되고 싶은데 능력도 용기도 없어 체념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세상이 내 의지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 신의 존재가 궁금해졌고 교회를 찾게 되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말을 들었기에 남녀를 차별하지 않은 줄 알았다. 그분 안에서 내 상처도 치유되리라 기대했다. 그랬는데 성경을 읽다가 절망했다. 첫 사람 아담을 만들어 놓고 하시는 말씀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또 여자를 만들어 놓고는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서로 도우며 살라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먼저 만들어 놓고 그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애초에 남자를 주인공으로, 여자는 그 보조쯤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이게 공평한 건가요?” 따져 물었다. 하나님과 가까워져도 “돕는 배필”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과 의문이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그러다가 몇 년 후 어머니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에쩨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 해석을 듣고 나니 머릿속에 환한 등불 하나가 켜졌다. "아, 이거다!" 에쩨르를 내 인생의 단어로 정해버렸다. 지금까지 답을 찾지 못했던 물음표가 한순간에 풀린 느낌, 어릴 적부터 줄곧 따라다니던 "쓸데없는 계집애"라는 말이 천리 밖으로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에쩨르는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울 때 그 단어를 썼다고 한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에게 서로 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성경에는 스무 번 넘게 에쩨르가 나오는데 그 모두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울 때 사용되었다. “돕는 배필”에도 같은 에쩨르를 사용하신 것이다. 돕는 것은 힘 있는 자가 하는 일이다. 의사가 환자를, 건강한 자가 약한 자를, 부모가 어린 자녀를 도울 수 있다.

번역 과정에서 그 섬세한 의미가 전달되지 못했지만 돕는 배필의 의미는 마주 보는, 서로 돕는, 나란히, 전우... 위아래가 아닌 존재 연합의 의미란다.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있다. 한 치의 쇠붙이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데 그게 어찌 살인에 관한 말이겠는가. 단어 하나가 이렇게 깨달음을 주고 사람을 감동, 변화시킬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촌철살인이 아닌가.

젊은 날 홈패션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앞치마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바느질이 너무 엉성해 뜯어고친 적이 있다. 첫 작품은 부실하기 마련이다. 여성은 정교하고 완전하게 지어진 존재, 창조의 절정인 것이다.

더구나 남자와 여자는 재료부터 다르다. 남자는 흙으로 빚었지만 여자는 뼈로 빚었다. "맞아, 나는 본차이나였어!" 긍정 토파민이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되었다. 자주자주 행복한 최면을 걸다 보니 바닥에 있던 자존감이 쑥쑥 치고 올라왔다. 미운 오리새끼가 자신이 백조였다는 것을 알고 푸른 하늘을 박차고 날았던 것처럼 내 겨드랑이에서도 날개가 돋았다. 정체성의 회복이었다. 더불어 존재감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충만함으로 벅찬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여기저기 에쩨르를 알리는 전도사가 되었다. 그 단어를 붙들고 회복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무렵 도자기 공장에 견학 갔다가 본차이나 접시를 샀다. 빛이 투영될 만큼 얇으면서도 성능은 강해 함부로 굴려도 이가 나가지 않는다. 가끔씩 식탁에서 접시를 두드리며 남편을 향해 쏘아붙였다. "토기가 본차이나에게 덤비다가는 박살 나는 수가 있어!” 농담처럼 내뱉지만 속이 후련해진다.

여성은 하나님과 동역하여 생명을 낳아 기르고 가정을 세우고 공동체를 돕는다. 조력자가 아닌 주인공인 것이다. 여자 없이 이 땅의 가정들이 온전히 서겠는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사람 마음처럼 간사한 것이 또 있을까? 여성의 능력에 대해 알고 나니 돕는 자로서의 덕목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능력은 곧 책임이라지 않은가! 돕는 자가 되려면 인내도 온유도 더 많이 키워야 할 것 같았다.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단단해져야 할 것 같다. 날마다 조금씩 마음통 늘어나는 기적이라니! 자존감의 회복은 선한 에너지가 되어 나를 한층 고무시켜 주었다.

너무 오랫동안 각인되었을까? 이성적으로는 정리되었는데 감정은 아직 치유되지 않은 모양이다. 하나님께서 “너 이다음에 어떤 성으로 태어나고 싶냐?” 고 물으신다면 주저하지 않고 남자라고 대답할 것 같다. 아직도 내 안에 쓴 뿌리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쓴 뿌리- 성경 히브리서에 나오는 말로 성도의 삶을 해치는 분노, 원한, 거짓된 교리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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