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

by 에쩨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하는 친구가 갑작스런 물음표를 던졌다. 남편 말고 썸을 탔던 사람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가끔 엉뚱한 질문으로 내 속내를 훔쳐보곤 한다.

전광석화로 지난 세월을 훑었는데 없었다. 슬로 모션으로 돌려 봐도 비 오는 날 떠올릴 이름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삶이었다. 철없는 나이에 만나 함께 늙어가는 백 년 웬수, 내 인생에 남자는 오로지 남편 한 사람뿐이었다. “없네.” 대답을 해 놓고 돌아서서 “잠깐만!” 하며 나는 그녀가 놓은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아이는 반장, 나는 부반장이었다. 어느 날, 책상 위에 쪽지가 놓여있었다. “순의와 성민이는 연애한다네. 순의는 성민이 각시라네” 연애라는 말만 들어도 부끄럽던 시절이었다. 나는 총총걸음으로 그 쪽지를 교탁 위에 갖다 놓았다.

선생님은 성난 표정으로 누구 짓이냐고 물었다. 끝내 묵묵부답이자 남학생들만 옆 교실로 나오라고 했다. 잠시 후 매 맞는 소리와 자지러지는 비명이 섞여 들렸다. 시망스러운 친구 하나가 옆 교실을 엿보고 와서 배를 잡고 굴렀다. 애들은 아랫도리를 벗고 책상 위에 올라가 있고 선생님이 돌아가며 엉덩이를 때리고 있다는 것이다. 매타작 소리는 오래오래 계속되었고 그날 수업은 종례 없이 끝났다.

소문에 의하면 선생님이 팔이 아파 못 때릴 정도로 족쳤는데도 끝내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미제사건으로 남겨둔 채 몇 달 후 졸업을 하게 되었다.

둘 다 말 수가 적은 데다 그 아이 집은 서쪽, 우리 집은 동쪽이었으니 학교 오갈 때 마주친 적도 없고, 성민이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나는 도시로 유학 나왔으니 바람결에라도 들은 얘기가 없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마음이라도 주고받았다는데 내 인생 행간 어디에도 그 아이는 없었다.

그리고 까마득한 시간을 지나 동창회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생의 바퀴를 돌아 반백을 넘긴 즈음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 위로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았지만 신기하게도 어릴 적 모습들이 남아있었다. 한글도 못 떼고 구구단도 못 외우던 개구쟁이들이 험한 세상 살아낸 것이 고맙고 대견했다.

또랑또랑 국어책을 잘 읽던 성민이는 지금도 목소리가 맑았다. 허랑 하지 않은 모습에서 여전히 반장 포스가 느껴졌다. 만감이 교차한 채 인사를 마쳤는데 짓궂은 녀석들이 신랑 옆에 앉으라며 성민이 옆으로 떠밀었다.

그동안 친구들은 모일 때마다 그 사건을 끌어와 안줏거리 삼아 곱씹었던 모양이다. 세 사람만 떠들어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더니 작당하고 흰소리를 해대며 신랑 각시로 놀려댔다. 자청해 들러리가 되어주겠다는데 농담하나 못 받아주랴 싶어 너스레를 떨었다.

“성민아!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나하고 말 섞어본 적 있어?”
“없는데!”
“그러면 단 둘이 만나본 적은 있어?”
“없는데!”
“그러면 편지나 전화, 그런 것 주고받은 적 있어?”
“없는데!”
“나랑 옆에 앉아본 것도 오늘이 처음, 내가 네 이름을 부른 것도 오늘이 처음 맞지? 이렇게 아무 짓도 안 해보고 놀림받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요즘 러브 샷이 유행이라는데 우리 그거라도 한번 해 볼래?”

갑작스러운 내 호들갑에 놀란 듯 성민이는 대답을 못하고 멈칫거리는데, 친구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타임머신을 타고 유년으로 돌아가 시끌벅적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성민이와 한동네에 살았던 친구가 얘기를 들려줬다. 성민이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개가하는 바람에 여동생과 함께 할머니 손에서 자랐단다. 어렵게 공부해서 피아노 조율사가 된 뒤 결혼했는데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두 아이 혼자 키우다 늦게 재혼했는데 이번엔 본인이 암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카락도 듬성듬성하고 몸도 왜소했구나!’ 불행도 대물림되는 걸까? 생의 들판을 헉헉거리며 달려온 그 인생이 애처롭고 짠했다.

그리고 지난겨울, 단체 카톡에 눈사람 사진을 올렸더니 줄줄이 댓글이 올라왔다. 눈사람이 성민이 닮았다는 것이다. 장난이 길어질 것 같아 안과에 가보라는 짧은 글을 남기고 나와 버렸는데 오후에 다시 카톡이 울렸다. 성민이 댓글이 올라와 있었다. “사는 게 다들 답답할 텐데 옛 추억 끌어다 잠시라도 웃을 수 있어 다행이네. 아무래도 우리 얘기로 영화 한 편 찍어야 할 모양이다. 주인공은 당연히 순의와 내가 되겠지?” 성민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들먹인 것이다.

답글을 본 순간 갑자기 ‘운명과 거래해서 젊은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아이의 각시가 되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리고 물음표 하나가 남았다. ‘그 아이는 과연 나를 좋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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