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고백하건대 이 향토적이고 올디너리한 네이밍은 결코 내 작품이 아니다
이 두 녀석은 쓰봉이가 창고에 덜렁 두고 가버린 녀석들이다. 또래에 비해 체구가 컸던 건지, 우리가 모르는 새 사람 손을 탔던 건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쓰봉이는 다섯 마리 중 이 두 녀석을 먼저 독립시켰다.
아마도 양남이의 큰 대굴빡이 이유일까 싶기도 하다.
여하튼, 우리도 모르는 새 아이들은 창고에 남겨졌고, 착하고 다정한 직원분이 아기 고양이용 사료를 사서 먹이기 시작한 후로 아이들은 본격적으로 사람의 손을 타기 시작했다. 서늘한 초겨울. 바람에 삐그덕 거리는 회사의 대문을 열면, 저 멀리서 두 마리의 노란 아이 고양이가 오도도 달려왔다. 달려오더니 벌렁 드러눕고, 잔망을 떤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고 너덜너덜해진 황무지 같았던 나의 마음에 달려들어 지분지분 밟아 새싹을 돋게 해 준 녀석들의 이름은 양남이와 양자가 되었다.
아- 고백하건대 이 향토적이고 올디너리한 네이밍은 결코 나의 작품이 아니다.
우리 집엔 네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그중에서 두 마리만 내가 지은 이름을 갖고 있다. 나머지 두 마리는 유기묘 출신의 아이들이었는데, 구조자분들께서 지어준 이름이 나쁘지 않아 그대로 이어받아 부르고 있기 때문에 나의 센스-가 공식적으로 발휘된 네이밍은 첫째와 둘째 고양이밖에 없다. 그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던가! 둘을 같이 불렀을 때 리듬감 있고 조화롭게 흘러갈 수 있도록 발음과 악센트, 그리고 뜻까지 조합하여 고민 끝에 지어 붙였지만 늘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번에 이름을 지을 일이 있다면 마! 인풀루언써! 고양이 이름같이, 호두라든지 땅콩이라든지, 모카라든지 그런 언젠간 트렌디하고, 귀염 뽀짝 한 이름을 지어줘야지 했는데 양남과 양자가 당췌 뭔 말이란 말인가.
발단은, 아이들에게 밥을 주던 직원분이 양이야~하고 부르다 두 마리니까 대충 성별을 나눠 양순이와 양남이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약간의 디벨롭을 거쳐 양자. 양남이로 굳혀졌다(대체 뭐가 다른 거임?)
절망적인 네이밍에 충격을 먹고 주저 앉은 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개명을 시도해 보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이름과 너무 잘 어울리는 (촌빨 날리는) 외모를 지니지 않았냐는 남편의 논리적인 주장에 좌절되었다.
양자와 양남이가 꿈동산처럼 공장 마당을 뛰어다닐 때, 멀찌감치 따라다니는 큰 고양이의 모습이 종종 발견됐고 우린 조금 긴장했다. 녀석의 정체는 원남이를 쫓아내고 공장을 영역 삼은 두남이었다. 쓰봉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허겁지겁 떠난 이유가 두남이는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했었다. 우두머리 고양이는 종종 자기 영역에 들어온 새끼 고양이를 물어 죽이기도 한다는데... 혹시라도 두남이가 양자와 양남이에게 해코지를 하진 않을까 긴장된 시선으로 추적 관찰한 결과 걱정과는 달리 두남은 마치 자기 새끼들 인양 양남. 양자(이하 쓰둥이들)를 보살피고 있었다. 쓰둥이들도 한참 놀다가, 두남이가 보이면 두남이에게 달려가 똥꼬를 보여주고 코뽀뽀를 하고 돌아오곤 했다. 혹시 두남이가 아빠는 아닐까? 했지만 길고양이 중성화 TNR의 흔적인 커팅된 한쪽 귀를 보니 그건 아니었다. 두남이는 그저 하릴없는 동네 힘센 아저씨였던 것이고, 얼결에 무료 양육 서비스까지 하고 있던 것이다!
두남이는 무척 너그럽고 관용을 베풀 줄 아는 고양이였다.
식사시간, 혈기왕성한 아기 고양이들이 두남이의 밥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개진상을 떠는데도, 두남이는 묵묵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쓰둥이들이 먹고 남긴 찌꺼기들을 먹고 가곤 했다. 단 한 번도 위협을 하거나 쫓아낸 적이 없었다. 밀면 밀치는 대로 비켜주는 젠틀맨이었으나 두남이는 고양이에게만 서윗한 녀석이었다.
내가 장난치다 조금이라도 쓰둥이에게 과격한 모션을 취한다 싶으면 근처에서 쳐다보고 있다가 호랑이 같은 얼굴로 하악질을 하질 않나, 야무지게 끼고 있는 허연 글로브(직접 보면 귀여운 냥냥펀치가 아니라 레알 권투 글러브 같다)를 위협적으로 휘두르거나... 뭐 그런 식이다.
맞짱 뜨면 단번에 질 자신이 있는 나로서는, 한껏 쭈그러져 쓰둥이들의 밥그릇에 츄르 한 번 더 짜주는 방식으로 '해..해치지않아용..'하며 아부를 떨었고 두남은 그런 내 찌질한 모습을 흡족한 듯 바라보다 어슬렁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져서 한참 뒤에나 돌아오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