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괜찮아. 하나도 무섭지 않을 거야.
변호사만 찾다 끝난 면회가 끝난 지 2개월 하고도 2주가 지난 오늘.
9월의 초입이었다.
그동안 난 별일 없이 지냈다. 어쩌면 별일이 없는 것이 별일 일정도로 따분한 나날들이었다. 입소 환자들의 면회 순번이 한 바퀴 돌고 나면, 2회차 예약을 잡아주겠다던 요양병원의 문은 코로나 단계 격상으로 다시 굳게 닫혀버렸는데,
-면회 무기한 보류-
시설의 안내 문자를 보며 이해가 갈듯 말 듯, 심란한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2번의 면회에서 하고 싶은 말을 거의 꺼내놓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평온했다. 그러나 이 마음이 과연 진정으로 평온한 것인지에 대해선 확언할 순 없다. 체념인지 단념인지 알 수 없음이다. 언제는 내 감정을 정확히 정의할 수 있었던 적이 있었나. 요양병원은 살아서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 노인들끼리의 주고받는, 약간의 크리피함을 곁들인 자조적인 농담이지만 서늘하게도 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순번이 몇 번이나 돌아올 수 있을지 세어보는 건 굳이 의미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빠가 돌아가시는 걸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의 미래는 그것뿐이 없지 않은가.
기적처럼 아빠의 모든 병이 씻은 듯이 회복되어 두 다리로 거뜬하게 나올 수 있다면...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한 적도 없었지만, 뼈에 가죽만 간신히 걸쳐져 있는 아빠의 다리를 보며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이별뿐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간절하게 죽음을 밀어내고 싶었지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를 순 없었고 마침내 그것과 마주해야 했다.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시간은 오전 11시.
"어르신 혈압이 떨어지시고, 산소포화도도 많이 떨어지셨어요. 현재 의식 없으시니 바로 오시길 바랍니다."
그냥 직감이 왔다. 아빠가 떠나려고 하시는구나.
남편과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일요일 오전이라 다행히 차는 막히지 않았다.
순식간에 도착한 병원 입구. 온몸을 소독하고 방호복을 입고, 아빠에게 올라간다. 이번엔 누구 한 명 막는 자 없이 조용하다. 이윽고 도착한 병실. 처절하리만치 섬칫한 공기와 마주한다. 아빠는 그저 누워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빠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그릉대는 가래소리만이 병실바닥에 조용히 내려앉아있었고, 나는 저 소리가 무엇인지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임종 증상이다.
첫 번째의 입원 당시 아빠의 난동으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는 그냥 제발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임종 증상이나 장례식장 예약 따위를 검색해야 잠을 청할 수 있었던 적이 있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짐으로 인한 손톱의 청색증. 목의 가래가 그릉대는 소리. 저혈압. 흑변 등이 임종 증상에 속하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아빠의 모습은 모두 다 임종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의식은 있으시니 하고 싶으신 말 있으시면 하세요" 의사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 있나.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준비한 말도 없었고, 준비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매너리즘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고민해야 했다. 나라면 무슨 말이 듣고 싶을까. 오랜 생각 끝에 아빠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 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아빠 괜찮아. 하나도 무섭지 않을 거야.
아빠는 겁이 많다. 사람 나이 여든이 넘어가면 어느 정도는 초월적인 마인드가 장착되지 않나?라는 나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아빠는 여전히 서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처럼 살았다. 철딱서니 없다.로 요약할 수 있겠지만, 굳이 하진 않겠다. 여하튼 죽음에 관해서도 그랬다. 아빠는 본인이 죽을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말했고, 살았다. 사후 처리와 대비에 대한 이야기가 어쩌다 나올라치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가 죽긴 왜 죽냐며, 마치 영생을 약속받은 사람처럼 죽음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그런 아빠가 홀로 죽음의 길에 올라 무서워할 것 같단 생각이 드니 마음 한편이 시립고 추워졌다. 얼마나 무서울까. 얼마나 죽기 싫을까.
"아빠. 다 괜찮아. 가면 할머니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고 고모도 있어. 거기서 가족들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 무서워하지 마."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한 걸까. 마치 주문처럼 쉼 없이 중얼대고 있으니, 이 말은 아빠가 아니라 나에게 하고 있구나를 깨달았다. 실은 나도 무섭다. 부모를 잃는 게 처음이라.
남편이 어깨를 툭툭 치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남편 역시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아버님. 걱정 마시고 가세요.. 따님은 제가 지킬게요."
그렇게 패악을 부리며 괴롭히고 마지막에 가선 싸움까지 치열하게 한 사위. 그러나 아빠가 가장 사랑하던, 처음이자 마지막 사위. 이제는 지난날 모든 것을 세월 속으로 침잠시킬 시간이다. 우리에게 남길 건 애틋함과 아쉬움뿐이다.
"아빠. 외롭게 해서 미안해.."
임종 면회가 끝났다.
혹시 모르니 되도록이면 근처에서 대기하라는 병원 측의 요구에 갈 곳이 없어 차에서 한참을 앉아있다 등산로가 있는 큰 공원이 있다는 포천으로 향했다. 한여름의 막바지라 해가 뜨거웠지만 나와 남편은 생수 한통을 사들고 무작정 위로위로 올라갔다. 기분은 생각보다 우울하지 않았다. 도리어 산뜻했다. 어쩌면 아빠가 저 좁은 요양병원 병실 침대 위를 벗어나 맘껏 훨훨 날아갈 수 있단 생각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불편한 신발로 산에 오르니 뒤꿈치가 까져 쓰라리고 숨이 목에 꽉 차올라 땀이 삐질삐질 났다. 정상에서 차가운 물을 들이켜고 하산하는 길 커다란 호수에 들러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주말 오전 가족단위로 많은 인파가 놀러 온 거 보니 유명한 관광지인 것 같았다. 그 후 우린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때워 어느덧 오후 7시가 되었지만 병원에선 아직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저녁식사는 냉면과 만두를 먹었다. 나는 시시각각 기다려야 했다. 아빠의 숨이 멎었다는 전화를 말이다. 얼마나 생경한가. 그래서인지 나는 시종일관 밝았다. 울지도, 슬퍼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았다. 먹고, 걷고, 돌아다녔다. 집에 와서는 늘 하던 게임도 두어 판 하고 고양이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새벽 2시쯤 잠이 들었다.
그리고 7시 30분 전화가 울렸다.
"어르신 영면하셨습니다. 괴로워하지 않으시고, 잠자듯이 아주 편안하게 가셨어요. "
아빠와 이별이다.
이젠 정말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