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D레터에서는 최근 소비자들의 '고자극 중독' 트렌드를 분석했는데요.
그런데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극, 쾌감, 참교육, 사이다' 콘텐츠를 찾게 만들었을까요?
이번 D레터는 대중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기 사이클을 중심으로, 불황기에 사람들은 어떤 콘텐츠를 선호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콘텐츠가 주로 소비될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선, 과거 경기침체 시기에는 분위기가 어땠을지 궁금해지는데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시절의 기사 제목은 모두 공통된 트렌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불황기에는 원초적 감성, 막장, Fun 코드가 뜬다."
이때 유난히 욕하면서 보는, 아니 욕하는 재미로 보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죠. (예: 아내의유혹) 이는 지난주 D레터에서 언급한 '공공의 적'을 만들고 댓글로 응징하는 최근의 정서와도 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연일 암울한 경제 전망이 쏟아지는 요즘의 콘텐츠 코드는 한마디로 '사이다'입니다.
안정기 : 주인공의 굴곡진 서사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상태
불황기 : 주인공의 굴곡, 시련은 암울한 현실에 위로가 되지 않음. 주인공이 끊임없이 해결하고 해소하는 사이다 서사를 원하는 상태
불황기일수록 드라마 속 캐릭터에 대리만족하려는 니즈가 더욱 강해집니다. 특히 내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또는 한 번쯤 상상해 본 현실 에피소드일수록 더 크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죠.
아래 그래프에서 최근 주요 드라마들을 살펴볼까요? ('22년 하반기 이후 런칭작 기준)
매운맛 ↔ 순한맛은 반복됩니다. (매운맛만 먹으면 질리고, 순한맛만 먹으면 싫증 나잖아요.)
그런데 '고난 서사', '사이다 서사'는 서로 반복되기보다는 하나의 경향성을 나타냅니다.
대부분의 히트작들이 매 회차 주인공이 응징하고 해결하는 '사이다 서사'를 따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기, 갈등, 시련 중심의 스토리가 진행되다가 막판에 실마리가 풀리고 해결되는 '고난 서사'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좀 많이) 거슬러 올라가 1930 대공황 시기에도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현실과는 다른 쾌감을 얻고자 했습니다. '재밌는 대화+빠른 전개+행복한 결말'이 특징인 'Screwball Comedy(스크루볼 코미디)' 장르가 유행했거든요.
그리고 2000년대 후반을 들여다보면 대공황기의 데자뷔 인가 싶습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에도 극장가는 붐볐고요. 코미디 장르가 박스오피스를 지배했습니다. (<트로픽 썬더>, <예스맨>, <겟 스마트> 등)
드라마도 마찬가지로 <빅뱅이론>, <두 남자와 1/2>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웃을 수 있는 드라마가 흥했습니다. 또한 쏟아지는 과학수사 드라마들 속에서 <NCIS> (a.k.a. 개그수사대) 의 유머와 위트가 충만한 캐릭터가 인기를 끌기도 했고요.
영타깃 드라마에선 콘텐츠로나마 현실 속 판타지,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10대들의 특징이 두드러졌습니다. 당시 <가십걸>에서 주로 소비된 것들은 어퍼이스트사이드 핫걸들의 일상과 패션, 스타일이었죠.
'불황에는 코미디' 공식, 미국 얘기만은 아닙니다. 2008년 금융 위기가 한국을 강타했을 때, 연간 소비자 물가 지수와 개그콘서트 시청률이 같이 상승하는 재밌는 현상도 있었어요. 개콘 특유의 개성 넘치는 코너와 유행어는 물론, 공개 코미디 홀에 모인 방청객들이 박장대소하는 모습까지 모두 TV로 송출되었죠. 웃음은 전염되고, 함께 웃을 때 더 즐겁다고 하잖아요. 당시 스트레스 날리는 데 효과 좀 봤을 것 같죠?
IMF 때는 어땠을까요? 1997년 이후 몇 년간 고통의 여파가 계속됐던 시기, 코미디 영화가 번성했어요. 1998년 흥행 2위 <주유소 습격사건(1999, 관객 250만)>을 필두로 여러 작품이 흥행하며 (<반칙왕(2000, 187만)>, <달마야 놀자(2001, 370만)>, <엽기적인 그녀(2001, 480만)>, <조폭 마누라(2001, 525만)> 등) '한국형 코미디 영화'의 지평이 열렸습니다.
외환위기로 주요 대기업들이 영화산업에서 철수했던 힘든 상황, 코미디는 '가성비' 좋은 장르였어요. 제작비가 저렴하고, 웃음으로 현실 도피 효과는 물론 풍자와 패러디로 대리만족까지 주죠. 극장가엔 연일 활기차고 긍정적인 포스터가 걸렸고요. 2001년 결국 IMF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웃음의 힘이었을까요?
대중 코미디 (공개방송, 영화) → 인터넷 짤방 코미디 → 영상 코미디 (유튜브, 틱톡)
미디어의 양상은 변해 왔지만, 여전히 웃음에 대한 갈망은 뜨겁습니다. 앞서 본 1998년, 2008년에 이어 2023년에도 역대급 경제 침체기가 올 것이라는 우울한 소식이 들리는데요. ㅠㅠ
시청자들도 더욱 재밋거리를 찾기 바쁜 모양입니다. '오락' 장르 채널의 위세가 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거든요.
('오락' 장르 : TV예능, 디지털 예능, 토크, 관찰카메라, 영상툰, 코미디/상황극, 브이로그, 웹드라마 등 포함)
앞으로는 어떤 코미디 콘텐츠가 유행할까요?
최근 6개월간 유튜브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 랭크된 영상 중 '코미디' 장르 61건의 유형을 분석해 봤습니다.
'캐릭터 코미디'
: 언뜻 보면 '진짜인가?' 헷갈릴 만큼 철저하게 설정된 가상 자아와 세계관을 연기하는 장르, 올해도 확실히 대세네요. '빠더너스(문쌤, 복학생)', '사내뷰공업(황은정)', '나몰라패밀리 핫쇼(다나카상)' 등의 채널이 번갈아 인동에 올랐습니다. 눈여겨 볼 점은 이제 가상 '캐릭터'를 넘어, 가상 '쇼'까지 만든다는 거예요. 교포 슈퍼스타들의 인기 최정상 팟캐스트(를 연기하는) '피식대학'의 '피식쇼'는 영어방송을 하며 진짜 해외 구독자 비율이 20%까지 늘었다고 하고요. OTT 역주행 1위 연애프로그램(을 연기하는) '유병재'의 '캐치미러브미'는 구독자들에게 '역대급 킹받음'을 선사하며 뜨거운 인기를 얻었습니다.
코미디 크루의 부상
: '게임/챌린지' 장르에서 여러 차례 인동 랭크에 오른 채널들('보물섬', '파뿌리', '더블비' , '박씨집안')의 공통점은 개인 유튜버가 아닌, 2~3인이 모인 '코미디 크루'라는 거예요. '친구 자동차 제주도에 버리고 찾게 하기', '친구카드 훔쳐서 전국 팔도 도망 다니며 플렉스하기' 등 친구를 곤경에 빠트리거나, 함께 모험적인 상황에 빠지는 콘텐츠들이 인동에 갔습니다. 프로 개그맨이자 인기 유튜버들이 똘똘 뭉쳐 결성한 '메타코미디클럽'도 K-스탠드업 코미디의 부흥을 노리며 인동에 종종 올랐습니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과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가 공존하는 시대.
'이생망' 정서는 현실 도피성 회귀물, 판타지를 찾게 하기도 하고
'중꺾마' 정서는 거침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이다 캐릭터를 찾게 하기도 합니다.
한때 '이생망' 정서가 사회 전체를 휩쓸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슬램덩크의 흥행 등 '중꺾마' 정서가 더욱 힘을 얻고 있는데요. 젊은 소비자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줄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사이다 콘텐츠는 드라마, 코미디 장르를 불문하고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황은정'과 'Ditto'에 열광하는 요즘! 현실이 매울수록 추억팔이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튜브 등에서 과거 콘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는데요. 최근에는 소비자들이 직접 영상을 재가공해 운영하는, 고인물 향기 물씬 나는 추억 여행 채널들이 부쩍 눈에 띕니다.
그중에서도 불친절하지만 그 어떤 설명 보다 확실한 제목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사랑방선물' 채널을 소개합니다. (그 시절 그 사탕 이름 맞습니다. 채널 이름부터 심상치 않음. ㄷㄷ)
왼쪽 영상의 제목은 <황은정>인데요. 대체 어떤 영상이길래 하고 누르는 순간 납득이 됩니다. '사내뷰공업' 채널에서 황은정이 불렀던 (혹은 불렀을 법한) 노래들의 무대 영상 모음집이죠.
댓글: "사랑방장의 디토는 이랬구나...."
그 외에도 "이걸 어떻게 알지?" 싶은 영상부터 모두가 공감할 만한 영상까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으니 구독자 여러분들도 함께 추억 여행 떠나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