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신체와 싱가폴
세상이 나를 점찍어 시험에 들게 하는 날들이 있다. 이 날이 꼭 그랬다.
회사에서 실수를 했다.
누군가라면 안 했을 실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였다. 그런데 하필 싱가폴로 출장을 가기 직전 날 그 실수에 대해 알게 되었고, 또 하필 그날 난 짧지만 굵직한 감기에 시달렸다.
서러웠다.
실수를 발견하자마자 해결하기 위해 한 노력이 또 문제를 낳고, 그걸 처리하며 내린 결정이 알고 보니 또 실수였다. 그 와중에 묽은 콧물이 자꾸 흘러서 티슈를 가지러 몇 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 갔다 했고, 머리가 핑 돌도록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먹었던 강한 약이 손, 발끝의 감각을 흐려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혀뿌리에 미세하게 좀 전에 먹었던 약의 쓴맛이 남았다. 그건 실패 같은 맛이었다.
칼바람을 맞으며 공항버스를 기다렸지만 8시 12분까지 도착한다던 공항버스는 모종의 이유로 오지 않았고, 결국 퇴근하는 사람으로 가득한 9호선 급행열차를 탔다. 내 몸만큼 큰 캐리어를 쥔 채 사람들 사이에서 덜컹거렸다.
요즘 리사 펠드먼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읽는다. 거기서 그녀는 감정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똑같이 심장이 똑같이 빠르게 뛰는 것을 누군가는 두려움, 누군가는 설렘, 누군가는 놀람으로 정의하고, 그 상황과 그 사람의 맥락에 따라 몸의 반응에 감정의 이름이 재각각 다르게 붙여지는 것이라고.
그런데 이 날은 내 몸이 내뱉는 신호들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약기운 때문일까? 남들과 이리저리 부딪히는 내 신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텅 빈 공항을 통과해 게이트 앞에서 독서하는 내 두 눈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았고, 맛있지도, 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로 역겹지도 않은 기내식을 삼키는 내 입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았고, 비행기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 두 다리도 내 것인지 의심되었다.
호텔에 얼리 체크인을 하고 느린 한국의 시간에 맞춰 일을 처리하다, 호텔의 와이파이가 너무 약해서 힘들게 싱가폴에 있는 회사 오피스로 이동해 마무리했다.
하루가 참 길었다.
배는 안 고팠지만 어딘가 너무 허기졌다. 그래도 식당가를 돌아다니다가 점심에 못 먹은 락사를 파는 식당을 발견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결제를 하려고 했는데, 법인카드와 개인카드 모두 이유 없이 결제가 안 됐다.
오늘 하루 겪은 것 중 가장 사소한 실패였는데도 그전에 버텼던 다른 사건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답답하고, 슬프고, 화가 났다.
그건 항상 갑자기 온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피가 뇌로 흘러가는 경로를 느낄 수 있었다. 두 눈은 침침했다. 혀와 입안이 바싹 말랐고, 이마의 바로 뒤쪽이 지끈거렸다.
가게를 지나치는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들은 신났고, 누군가는 지쳐 있었다. 가족들끼리 온 사람도 있고 혼자 온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이 누구든 - 하루 종일 둥둥 떠다닌 나와 달리 중심을 잡고 존재하고 있었다.
악재는 한 번에 밀려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외부에 대해서,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몰랐던 것들을 보도록 억지로라도 유도된다. 태어나서 처음 와 보는 쇼핑몰의 번쩍이는 전광판들 사이에서, 어딘가로 미끄러지는 듯한 감각을 맞으며 깨달았던 것 같다: 다시는 이렇게 혼자이고 싶지 않다.
붕괴의 결과는 무겁더라도 그것의 시작과 끝은 한없이 가벼울 수 있다. 이런 순간들이 올 때 나와 함께해줄 사람, 날 이해하고 지탱해줬던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내가 느낀 감정이 그리움, 불안, 외로움 중 무엇인 지 점찍을 수 없었지만, (리사 펠드먼은 이게 감정의 미성숙을 나타낸다고 지껄이겠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건 명확했다.
결국 락사는 못 먹었지만, 대신 한 그릇에 5.5 싱달러짜리 국수를 파는 허름한 가게에서 끼니를 때웠다. 허벅지가 쩍쩍 달라붙는 의자에 앉으니 건너편에 가장 좋아하는 코코넛 스무디 가게가 보였다. 국수는 생각보다 맛있었고, 수제 식초가 특히 특이해서 좋았다. 다 먹고 나서 코코넛 스무디를 샀다. 판단 볼도 추가했다.
밖으로 나갔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왼손에는 녹아가는 코코넛 스무디를 쥐고 그랩 택시를 기다렸다.
내가 좋아하는 동남아의 습기를 얼굴로 맞으며 조금 걷다 보니 빠르게 뛰던 심장은 잠잠해졌고, 두 눈은 컴퓨터를 멀리하니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마의 지끈거림도 멈췄다. 그리고 왼손은 축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