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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Jan 26. 2024

여기 사람들은 과거를 살고 있는 거야

고집쟁이의 유럽여행 (피렌체 4): 우피치 미술관, 달오스떼, 마지막 날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고 피렌체를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시간이 흐르고 각자 연인이 생겼음에도 둘 사이에 있었던 뜨겁고 진실됐던 사랑을 잊지 못한다. 남자 주인공 준세이의 스승 조반나는 이렇게 조언한다.


“여기 사람들은 과거를 살고 있는 거야. 준세이, 넌 질투 따위에 지지 마. 네겐 미래가 있잖아. “ 



피렌체 인구는 38만 명이다. 관광객은 100만 명이다. 

관광 산업으로 먹고사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얼핏 보면 미켈란젤로, 메디치 가문, 보티첼리 등 조상의 덕을 대대로 누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것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실외기도, 지하철도 못 설치한다. 땅만 파면 문화유산이 나오는데 어떻게 감히 착굴기로 땅을 헤집겠는가.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해 발전을 포기한 피렌체 사람들.

재건축은 꿈도 못 꾸는 건물 아래 깔린 비포장 도로에서 저속으로 움직이는 차들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피렌체가 장난감 도시 같다고 느꼈다.

사람이 사는 공간에 일정 기간 머물며 함께하는 기분이 아니라 디즈니랜드 같은 놀이공원에 입장료를 내고 체험하는 것 같았다. 

가장 유명한 어트랙션을 돌아다니며 놀이기구에 하나씩 탑승하는 것과 유사하게, 거의 모든 관광객이 브루넬리스키 패스를 끊어서 조토의 종탑, 오페라 미술관, 두오모 꼭대기에 올라간다.

롯데월드에 가면 추로스는 꼭 하나 손예 쥐고 다니는 것처럼, 거의 모두 티본스테이크를 먹는다.


관광지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


이 찝찝한 기분은 티본스테이크 식당인 “달오스떼”에 갔을 때 가장 강렬했다.

달오스떼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정말 유명한 식당인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게 바로 느껴진다. 고객의 과반수가 한국인이라 메뉴판도 한국말, 카운터 앞의 직원도 한국인, 주변에서 들리는 말소리도 한국어다. 솔직히 피렌체가 아니라 이태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 같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분위기라 맛에 집중하기 어려웠다…라고 말하기엔 정말 맛있게 먹기는 했다!


안심 부분이 정말 맛있었다


되게 웃긴다. 

나도 그 관광객이면서, 똑같은 관광객들을 횡단보도의 비둘기같이 거슬리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목요일 오후 2시에 자라에서 쇼핑하면서, ‘도대체 목요일 오후 2시에 자라에서 쇼핑하는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지?’하며 의아해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내 짧은 생각은 정말 뜬금없게도, 우피치 미술관을 방문하며 많이 바뀌었다.




조토부터 시작해 라파엘로, 보티첼리, 다빈치, 까라바죠, 렘브란트까지 피렌체의 위대한 예술가들을 순서대로 맞았다. 2500점의 그림들을 만들어진 순서대로 감상하다 보니 피렌체 미술사의 흐름이 명확하게 보였다.


예술은 유행과 모방의 연속이라고 한다.

미적인 가치는 배제하고 중요한 인물은 크게, 일반인들은 작게 그리며 원근법을 무시한 기존의 종교화. 평면적이고 교육적이기만 했던 종교화에서 갑자기 마리아의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다 종교적인 가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사람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가 펼쳐진다. 옆모습을 그린 초상화, 자신의 가족을 모델로 한 마리아와 예수, 그리고 결혼식 선물로 제격이었던 원형 액자 형식이 등장한다.



보티첼리부터 누드화가 시작된다. 종교화에서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의미를 벗어나지 못한 나체가 지금부터는 아름다움의 극치가 된다. 아르 누오보도, 포르노그라피도 등장한다.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황금비율, 8등신, 삼각 구도 등 미술의 기본이 확립된다.



그리고 아름답기만 한 것들을 벗어나기 시작한 주제. 까라바죠의 메두사와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의 잔혹한 그림들을 감상했다. 아버지의 친구에게서 성추행을 당하고, 손톱을 뽑는 등의 고문이 동반된 재판 후에 그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에 성공한 젠틀레스키. 그녀는 죽어가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그 남자를, 유디트의 담담한 얼굴에 자기 자신을 그려 넣는다.

여자가 붓을 드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같은 화가였던 아버지 어깨를 넘어 배운 미술로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에 입학까지 한다. 


가장 유명한 화가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과거에게서 영향받고, 자극받고, 그것을 보완하려고 노력하며 발전한 것이다. 유행과 모방을 거치며!



마지막 날, 공항으로 출발하기 한 시간 전,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두오모 디 피렌체 앞을 서성였다. 카페가 하나 열려 있었다. 짧은 일정이라 콤팩트하게 움직이느라, 카페에서 여유를 갖고 멍 때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라스에 앉아서 탄산수를 하나 주문했다. 마침 날씨도 그간의 피렌체 날씨를 통틀어 가장 화사했다.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두오모 벽을 응시했다. 관광객이 많다는 핑계로 그 상아색, 엷은 청록색, 옅지만 강단 있는 붉은색 타일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관광객은 여전히 많은데, 희한하게 그 색들이 오늘은 눈에 들어온다. 



그다음으로는 벽에 붙어있는 조각상들을 하나하나 봤다. 단테는 정확히 찾은 것 같은데, 미켈란젤로나 조또, 라파엘로는 찾으려고 노력까지만 했다!



마지막으로는 관광객들을 봤다.


스페인어를 쓰는 가족이 그림을 그리는 잡상인을 지나치고 있었다. 작은 소년인 아들은 무언가를 갖고 싶다며 칭얼댔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며 몇 분간 큰 소리로 "Te queda claro? (엄마 말 알아들어?)" 하며 혼냈다.

아이는 거듭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무룩한 채로 광장을 벗어났다.


그걸 본 프랑스 커플은 피식 웃고서는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빠르게 무언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짧은 프랑스어 실력에 정확한 내용은 잡아내지 못했다. 그들도 자녀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을까?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온 것 같은 중국인 모자도 마주쳤다. 


어머니께서 내게 빠른 중국어로 무언가를 질문하셔서, 

"我是韩国人(저 한국인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잠깐이지만 중국어를 했더니 밝은 얼굴로 계속 말씀을 걸어오셨다. 영어로 계속 번역해 줬던 아들 쪽에서만 애를 먹었다.

둘의 대화를 엿들어보니, 어머니의 혼쭐과 아들의 방어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와 여행 온 아들의 표정은 계속 밝았다. 어머니도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과거를 간직한 피렌체에 방문하는 현재의 사람들은 곧 미래를 살 것이다.

과거에서 비롯되어 탄생한 우피치 미술관의 명작들처럼, 과거를 알기 위해 피렌체에 온 사람들이 무엇을 만들어낼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향기로운 꽃 주변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다채롭고 풍부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피렌체를 향해 사람들이 오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다. 나비 날개의 아름다운 색을 관찰하는 것도 꽃을 감상하는 방법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주문한 탄산수의 마지막을 목으로 넘겼다. 어쩌면 미래에도 과거에 살고 있을 피렌체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세상에 많은 것들이 그렇지 못하지만, 피렌체만은 그대로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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