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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Jan 24. 2024

네, 제가 그 바보인데요?: Take it slow

고집쟁이의 유럽여행 (피렌체 2): 시에나, 두오모 쿠폴라

“예지는 파리 가면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아빠는 “베르사유 궁전에 가고 싶어!” 내지는 “루브르에 가고 싶어!” 같은 대답을 예상하신 것 같은데, 난 줄곧 해 오던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렸다.


“Book-smart 말고 street-smart 한 사람이 되고 싶어.”


난 분명 특정 분야에서는 꽤 똑똑한 편인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너무나 멍청하다.

수의 계산은 빠른데, 사람 간의 계산에는 느리다.

전체적인 그림은 잘 보면서, 세부사항은 금방 까먹는다.


한동안은 외동딸이 필연적으로 받는 과보호의 산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잘 곱씹어보니 내가 그냥 원래 좀 그런 것 같다.

날 대충 아는 친구들은 의아해해도, 나랑 깊이 친한 친구들은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내 바보짓 이야기를 한 번 시작해 볼까?




아기자기한 피렌체는 내 예상보다도 작았다. 오페라 박물관을 둘러보던 중,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충동적으로 시에나에 가고 싶어졌다. 중세시대에 피렌체와 팽팽하게 대치했던 시에나는 이름만큼이나 예쁘다던데!


곧바로 구글맵을 켜고 시에나를 검색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한국에서 사 갔던 e-sim에 문제가 생겼는지 GPS가 갑자기 작동을 멈춰서 “내 위치”가 추적이 안 됐다. (참고로 이럴 때는 그저 전원을 껐다가 재시작하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게다가 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소실된 상태여서 도시 외곽으로 떠나기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그저 시에나로 가득 차 있었다.

무언가에 꽂힌 손예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적다.


그래서 그냥 시작점에 “오페라 박물관,” 도착점에 “시에나”를 검색했다. Proconsolo 역에서 고속버스 역인 Leopolda T1 Porta Al Prato 역으로 간 후, 버스 역인 또 다른 Stazione Leopolda역에서 고속버스를 타면 시에나다. 이지피지!


다급한 검색의 흔적


지나가던 관광객들과 그들 폰에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구글맵의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Proconsolo 역에 왔는데, 티켓을 파는 곳이 어디에도 안 보였다.

어리둥절한 채로 허둥대고 있으니 버스 정류장 바로 옆 담배 가게를 운영하시는 아저씨가 영어로 말을 걸어오셨다. 느긋한 눈과 희끗한 머리, 그리고 많이 웃어야지만 생기는 입, 눈가의 주름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안심됐다.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희미한 미소를 띠고서 나보다 두 배는 느린 말투로 거듭 반복했다.


“Take it easy, take it slow. (진정하고, 천천히 해봐)”


설명을 듣고 나서 똑같은 느린 말투로 여기는 매표소가 아니고, 버스 티켓을 사려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까지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다. 망연자실한 내 표정을 보고 풉 웃으셨다.

말투와 똑같이 느긋한 몸짓으로 주머니에서 버스 티켓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그라찌에! 를 외치며 1.7유로를 갚기 위해 지갑을 여는 내 손을 잡고 예상치 못한 강한 힘으로 저지했다.

나와 눈을 정확히 맞추고, 단어에 맞춰 내 팔을 지긋이 두 번 눌렀다.


”There is no need to pay me back. Instead, take it easy, take it slow. (돈 갚을 필요 없어. 대신, 진정하고 천천히 해봐)”


Leopolda 역에 도착해서 피렌체에서 시에나까지의 왕복 티켓을 구매했다. 총 20유로, 싼 가격은 아니었다. 이제 버스 역 Leopolda에서 고속버스 역 Leopolda로 이동해 131번 버스를 기다리기만 하면 끝이다.


131번 버스는 거의 40분 간격으로 도착하기 때문에 역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손짓, 발짓, 영어, 구글 번역기를 동원해 가며 역무원을 포함한 4명 정도에게 위치를 확인했다. 10분만 기다리면 시에나로 가는 버스가 온다! 두근두근 설레기 시작했다.


2분 남았다. 짐을 다 가방에 담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버스가 오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도착 시간으로부터 2분 지났다. 버스가 안 왔다.


문제의 버스역... 너무 당황해서  사진이 거의 없다

잔뜩 겁먹고 곧바로 역무원에게 달려가 문의했다. 버스를 기다렸는데 안 왔다고.

역무원은 그럴 리가 없다며, 내가 서 있던 정류장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똑같이 반복할 뿐이었다.

아니, 내가 거기서 기다렸는데 안 왔다고요!


어쩔 수 없이 또 30분 정도를 앉아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버스가 안 오면 어떡하지? 차라리 피렌체에 계속 있었다면 젤라토라도 하나 더 먹는 건데...

놓친 기회들에 대한 아쉬움과, 또다시 잘못된 선택만 하는 것 같은 나에 대한 실망감이 몰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버스가 안 왔다.


이번에는 바로 역무원에게 갈 힘도 소진됐다. 조금 허탈한 채로 버스 정류장에 가만히 8분 정도 앉아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왼쪽 저 멀리서 131번 버스가 내 눈치를 보면서 뽈뽈 다가왔다.


그냥 버스가 늦은 거다!



아, 담배 가게 아저씨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

Take it easy, take it slow.

여긴 이탈리아인데, 처음부터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순리대로 해결됐을 텐데!


오늘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나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놓친 버스들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또 마음이 급해지면 담배가게 아저씨와 같은 속도로 호흡하며 되새김질하기로 결심했다. Take it easy, take it slow.


그간의 괴로움이 씻겨내려갈 정도로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었던 고속버스 여정!

힘들게 도착한 시에나는 사실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관광 비수기라서 문을 닫은 가게들도 꽤 많은 탓인지 피렌체와 유사한 느낌이었다.

시에나 캄포 광장(Piazza del Campo), 만자의 탑과 푸블리코 궁전
시에나 두오모 대성당(Duomo di Si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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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내부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별로였고, 안 하고 피렌체에 머무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해봤다는 것 자체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시에나에 즉흥적으로 가느라 미리 예약했던 두오모 쿠폴라 위에 오르는 입장권 시간을 놓쳤다.

브루넬레스키 패스를 30유로를 주고 구매하면 조토의 종탑과 쿠폴라 둘 다 입장, 등반이 가능하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 성당의 정상에 도착하면 피렌체가 한눈에 보여서 아주 유명한 여행 코스이다.


당시에는 시에나를 가는 것이 더 중요했고, 조토의 종탑은 이미 올랐기 때문에 굳이 두오모 쿠폴라까지 갈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했다.


조토의 종탑에서 내려다본 피렌체 전경! 빨간 두오모 뚜껑이 귀엽다


그런데 시에나가 간절해진 것처럼 또 정말 갑자기 쿠폴라를 너무 오르고 싶어졌다.

원래는 15:45분에 입장해야 했는데, 그 다음날 13:00에 우물쭈물 입장 문 앞에 갔다. 날짜도, 시간도 원래의 계획과 달랐다. 쿠폴라는 맑은 아침의 전경 또는 야경이 유명해서, 내가 시도한 오후 1시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때문인지 원래는 쿠폴라를 오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대기 줄이 성당을 빙 둘러도 부족할 정도였는데, 기적처럼 문 앞에는 대기하는 줄이 하나도 없었다.


문 앞을 지키는 경비원에게 곧 비행기가 출발하는데, 혼자 여행 왔으며, 나의 로망이었고, 꼭 쿠폴라는 오르고 싶다고 비굴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절실한 눈빛을 보내기도, 울상을 짓기도 했다.

이번에는 담배가게 아저씨의 조언을 따랐다. Take it slow.


내가 차근히 설명하자 경비원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No problem, no problem at all!" 하며 입장시켜 주셨다. 난 정말 럭키걸이다!


경비원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몇 번씩이나 인사하며 입장했다.


왼쪽 계단은 평소에 운동을 한다면 전혀 힘들지 않겠지만, 오른쪽 계단은 끝없는 나선이라 몇 분만 지나면 많이 어지럽다.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쿠폴라 뚜껑에 그려진 천장화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너무나 섬세하고 디테일이 풍부해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천장화 감상을 끝내고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꼭대기에 도착한다! 총 소요시간은 10분도 채 안 걸린다.


쿠폴라에서 내려다본 피렌체


화장기 없는 상태로 올라간 거라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내 예상처럼 사실 조토의 종탑과 비슷한 풍경이라 큰 감흥도 없었다. 난 그저 쿠폴라 꼭대기를 아주 천천히 빙글빙글 돌면서 시내를 내려다봤다.


The doors의 Strange Days 앨범을 틀었다.

빨간 지붕과 노란 벽을 한 귀여운 집들을 봤다. 길거리를 개미들처럼 뽈볼거리는 사람들을 봤다. 조토의 종탑에서 우리 쪽으로 손을 흔드는 관광객들도 봤다.


Moonlight drive가 나올 때쯤 관리인이 다음 팀이 올라오니 어서 내려가라고 제스처 했고, 그렇게 짧았던 방문이 끝났다.




덤벙대고, 실수하고, 다급하게 상황을 무마하려다가 더 심화시키는 것이 정말 나다운 두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명한 담배가게 아저씨와 친절한 쿠폴라 경비원을 만났고, 그들의 도움으로 결국 시에나도 갔고, 쿠폴라도 올랐다!

어쩌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수를 없애는 것보다, 실수가 일어나자마자 대응하는 방법을 익히는 게 내겐 더 맞는 방식이 아닐까?


담배가게 아저씨의 묘한 분위기가 여행이 끝난 지금도 자꾸 떠오른다. 그가 10분간 대화를 나눈 내게 줬던 그 조언은, 내가 최근에서야 깊은 고민의 끝에 깨닫기 시작한 지점을 놀랍도록 정확히 긁었다.

눈치 빠르고, 베풀 줄 알며,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는 담배가게 아저씨가 내가 되고 싶은 "street smart"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도 자꾸만 생각날 것 같다.

Take it easy, take it s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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