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쟁이의 유럽여행 (피렌체 3): 친퀘테레, 물리학자, 중앙시장
초등학생 시절 아빠의 출장을 핑계로 네 번 유럽으로 가족여행을 길게 했다.
어릴 때 여행을 많이 다니면, 무의식적으로 겁이 없어지고 낯선 것들을 꺼리지 않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비싼 돈 주고 여행 갔던 모든 경험들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큰 단점도 있다.
그 많던 여행 중 내가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하는 여행지는 한 곳밖에 없는데, 이탈리아의 작은 바닷가 마을들을 묶어놓은 친퀘테레이다.
5개 마을을 합쳐 놔도 인구가 1300명에 못 미치는데, 1200년대부터 와인으로 유명해지며 조그마한 마을들이 관광객으로 북적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년 전부터 관광지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피렌체에 온 김에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그 작은 마을들에 재방문하고 싶어졌다. 산골마을이라 차가 없으면 들어가기 어려운 위치라, 가이드가 진행하는 투어를 신청했다.
가는 길에 피렌체 두오모를 이루는 대리석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들었다. 지나치며 본 까라라 산지 위로 흰 대리석 조각들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끔찍한 사고를 당해 피부 위로 드러난 뼈처럼 보였다.
미켈란젤로와 로댕 같은 거장들이 최고의 퀄리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까라라의 대리석을 채굴했다고 한다. 피렌체 두오모의 빨간색 대리석은 폼페이에서, 초록색 대리석은 저 멀리 볼로냐에서 채굴했다. 파리의 거대한 성당에 비해 귀엽고 아기자기하다고 느낀 피렌체 두오모인데, 성당 하나 짓겠다고 전국 최고 품질의 돌들만 찾아 나선 피렌체의 자존심이 담겨있는 구조물이라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어렸을 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인 줄 알았던 초코파이를 나이가 들고서 한 입 먹으면 너무 달아서 울렁이는 기분, 정말 좋아하던 옛 애인을 다시 만나도 예전만큼 불꽃이 튀지 않는 그 서운한 기분이 느껴졌다. 장소가 좋았던 게 아니라, 부모님이 아직 젊고 나도 아직 잠재력이 무한했던 그 시기가 그리웠나 보다.
해산물 파스타 한 접시를 끝내고 너무 맛있다고 호들갑 떨며 똑같은 요리를 한 번 더 주문했었다. 작은 집들이 몰려있는 언덕이 불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셋이 손을 잡고 오늘을 계기로 더 열심히 살자며 다짐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엄마가 그때 먹었던 파스타를 재현하겠다고 몇 번이나 시도했던 (그리고 실패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너무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왜 끝나지 않는 것은 없을까?
산다는 것은 왜 매 순간을 지나 보내고 모든 추억을 상실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걸까?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이리 무의미하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대체 답은 뭘까?
다 같이 승합차를 타고 피렌체로 돌아왔다. 일행이 뿔뿔이 흩어지고, 예상보다 일찍 끝난 투어에 다음 행선지를 정하고 있었던 나, 그리고 구글 맵에서 길을 찾던 물리학자만 남았다.
물리학자는 피렌체 갈릴레오 갈릴레이 센터에서 열린 입자물리학 콘퍼런스에 참가하기 위해 대학원에서 한 달 정도 출장을 왔다. 우리 둘 다 일행 없이 온 거라 투어 내내 언어, 투자, 예술, 역사 등 정말 폭넓은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그도 그럴 만한 게, 그는 학부생 시절에 물리, 수학, 철학, 심지어 심리학까지 전공했다. 예술까지 전공했다면 피렌체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았을 텐데!
“정말 순수 학문만 공부했네요… 도대체 뭐가 진짜로 궁금한 거예요? 세상, 아니면 사람?”
인생이 연구, 크로스핏, 그리고 바둑으로만 이루어졌지만, 대화를 할수록 그보다는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점에서 과학 학술지는 꾸준히 샀으면서, 그 와중에 당구를 치느라 중학교 출석 일수를 못 채울 뻔했다. 2-3학년부터 조교를 하면서 대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다. 성실하고 이상하고 나랑 비슷한 사람이다.
물리학자도 나도 계획이 없어서 즉흥적으로 미켈란젤로 언덕을 오르기로 했다.
이미 피렌체에서 두 주를 보낸 물리학자는 하필이면 지리에 약해, 최고의 투어 가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베키오 다리를 건너고 수많은 관광객들의 뒤를 쫓으며 나눈 이야기들이 신속한 도착보다 훨씬 가치 있었다.
물리학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입자물리학자였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암흑 물질을 연구하는 입자물리학자였다.
우리가 잘 알고 거의 이해하고 있는 모든 별들과 갤럭시들은 온 우주의 4%만 구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는 아직 설명할 수 없는 암흑물질이 그보다 6배 정도 더 존재해서 우주 에너지의 25% 정도를 구성하고, 나머지 과반수를 훌쩍 넘는 에너지는 그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암흑에너지가 이루고 있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줄 알았는데, 이 광활한 세상 중 적어도 96%는 가장 저명한 학자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두려운 동시에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일몰 시간을 놓쳐서 깜깜했지만,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는 조명을 킨 듯 쉴 새 없이 반짝였다. 우리는 둘 다 말없이 풍경을 내려봤다.
“무슨 생각해요?” 물리학자가 물어봤다.
“반짝거린다?” 대답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불빛이 작아졌다가 커졌다가 하는데, 왜 그런 거예요?”
“빛이 다가오면서 공기 입자의 영향으로….”
물리학자의 말을 가로막고 소리 내 웃었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가죽시장 옆 청동 멧돼지상의 입에 동전을 던져 소원을 빌기도 하고, 작은 상점들을 지나치며 장신구나 식재료 따위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 서점이 눈에 띄었다. 여느 평범한 가게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커튼을 제치고 더 깊숙한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헉하고 놀랐다.
책을 분야별로 구분해 정렬한 책장들 사이 현지인으로 보이는 학생들과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북적였다. 왼쪽 측면은 엄청나게 큰 상영 스크린이 덮고 있었고, 그 바로 앞과 2층, 3층으로 이어진 테라스 위치에는 편안한 의자와 커피를 놓을 수 있는 테이블들이 진열되어 누구나 영화를 보며 독서를 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영화와 음식과 사람과 독서라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모여 있었다.
물리학자와 철학 코너, 물리 코너에 가서 얄팍한 이탈리아어 지식을 총동원하여 학자와 책 제목을 유추해 봤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일 확률이 높은 책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일 확률이 높은 책도 발견했다. 추측이 맞을지는 영원히 모르겠지만!
물리학자가 가장 좋아하는 학자는 과학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다. 파이어벤트의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장, "Anything goes(뭐든 된다)"
파이어벤트는 세상을 설명하는 방법은 한 가지로 국한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과학이 뿌리 깊은 논리적인 흐름을 가진다고 해서, 피렌체 사람들이 두 손을 모아 신뢰하던 신화나 종교보다 우월한 언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학이 정말 뿌리 깊은 논리적인 흐름을 갖는다고 할 수 있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아인슈타인도, 그리고 지금 갈릴레오 갈릴레이 센터에 모인 과학자들도 그것의 96%를 이해할 수 없는데?
걷다 보니 배가 고파져서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중앙시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에는 물리학자가 추천한 식당인 Osteria Vini E Vecchi Sapori에서 닭 파테, 핑크 소스 라비올리, 그리고 주키니 크림 파스타를 먹으며 와인 한 병을 나눴다.
아름다운 피렌체에서 맛있는 걸 먹으며 새로운 친구와 질 좋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친퀘테레에서 느꼈던 갑갑함이 서서히 잊혔다.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서 같은 행복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지금 느끼는 행복도 언젠가는 과거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수억 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이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겠지.
또 낙관적인 허무주의에 젖었다.
의미가 없는 이 우주에서 의미가 있는 기억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뜻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