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대기업 취업기 한국피앤지 P&G 취준 후기
주말에도 거의 매일 일을 했지만 가끔 보고 싶은 전시나 행사가 있으면 관람하며 머리를 식혔다.
8월 둘째 주 주말에는 인스타그램 "영화 속 거울" 계정주가 새로 오픈한 복합문화공간 소리그림에 가서 신예 감독들의 단편 영화를 봤다. 김예솔비 감독은 관객의 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감독들은 원래 자기가 만든 영화를 다시 잘 못 봐요. 부끄럽거든요. 자꾸 편집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요.
그런데 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리 걸작이라도 그걸 만든 감독은 항상 고치고 싶을 거라고. 그런데 부족하고 미완성이라도 그 당시에 만든 영화는 그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영화가 된 거잖아요."
난 피앤지를 다니며 거의 매일 이 회사에 입사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커졌다.
조금 부끄러운 버릇이 생겼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밤 10시 가까이 됐는데, 그때쯤에는 집 앞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모두 집에 들어가 있다. 난 가방과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두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크게 틀고 그네를 탔다.
얼마나 자주 탔는지, 헬스 하면서도 잘 안 생기던 굳은살이 중지 손가락 쪽 손바닥에 박혔다.
어느 날은 여느 때처럼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경비 아저씨가 날 수상한 사람으로 착각하셨는지 "저기요" 하고 멈춰 세우셨다.
내 얼굴을 보고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셨는지,
"허허... 적당히 타고 들어가요" 하고 들어가셨다.
아직은 밤늦게 혼자 그네를 타도 귀엽게 넘어갈 수 있는 나이인가 보다.
순간 이상하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날 이루는 서툶과 방황의 나날들이 서서히 끝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더 이상 젊음을 핑계로 서툴 수 없다"는 서운함보다는, 지금의 찌질함을 언젠간 끔찍하게 그리워할 것 같다는 기시감이었다.
갈수록 기쁨도 분노도 슬픔도 무뎌진다.
지금보다 키가 작았던 초등학생 시절에는 그네 타기를 싫어했던 기억이 있다. 또래보다 예민했던 내게 그네가 상승했을 때의 고도, 그리고 가속도가 붙는 하강의 감각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지금보다 마음의 키가 커지면, 그때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업무를 잘 못 파악하는 것 같다는 자괴감도, 친구가 멀리 떠나간다는 아쉬움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무뎌지지 않을까?
능숙하고 성숙한 내가 기대되면서도, 그녀가 기억하는 지금의 나도 나름대로 예뻐 보일 것 같았다.
피앤지에서는 인턴 기간 동안 각각 라인매니저, 코치, 그리고 버디를 배정해 준다.
최종 발표가 두 주쯤 남았을 때, 야근을 하다가 버디님과 늦은 시간까지 둘이 남아있게 됐다.
"예지님! 질문 하나만 받고 갈게요."
그간 느꼈던 기분을 요약해서 말씀드렸다. 어디서부터 막히는 건 지 잘 감이 안 온다고.
"제가 알기로는 XX에 정보가 풍부하게 있다고 들었는데, 예지님은 그걸 관찰하고 분석해서 결론을 내기보다는 결론을 정해두고 그 근거를 찾아내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갑자기 핵심을 깨달았다. 그날 집 앞 스터디카페에서 12시까지 갖고 있던 데이터를 다시 정리해 보고, 이어 바로 아래층의 PC방에 가서 또 두 시까지 이어 했다. 그 네 시간 동안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아예 바꿨다.
성장은 계단식이라, 그 후 일주일간 생각이 정리되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1:1 미팅을 잡아서 과정을 보여드릴 때마다 라인매니저께서 "또 바뀌었어요? 저번보다 훨씬 나아요" 하셨다.
그런데도 내 프로젝트를 아예 모르는 분들에게 보여드릴 때마다 1. 설명이 불친절해서 핵심을 모르겠다는 조언과 2. 내용이 너무 많아서 줄여야 될 것 같다는, 표면적으로는 너무나 상충되는 조언을 받았다.
한두 번까지는 수긍했는데, 같은 조언과 수정 - 후 또 같은 조언과 수정이 반복되다 보니 조금씩 지쳐갔다. 최종 발표 일주일 전에 다섯 번째로 보여드린 분에게 비슷한 조언을 들었다.
속에서 뭔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감각은 고등학교 때 더 자주 느꼈던 것이었다.
8년 전에는 힘듦에 눈물이 핑 돌면 왠지 내가 처량하고 불쌍하게 느껴졌고, 그런 내가 은근히 기특해서 자기 연민에 더 깊게 빠졌었던 기억이 있다.
25살의 나는 그때보다는 마음이 딱딱해졌다고 느꼈다. 울 것 같으니까 되려 그런 내게 분노가 느껴졌다.
김밥이랑 컵라면을 포장해 와서 사내 카페에 앉았다. 창밖은 노을을 지나 점점 어두워지는데, 일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너무 못나 보였다.
결국 밥만 많이 먹고 아무것도 못 바꾼 채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에 M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 오빠, 나 떨어질 것 같아."
이 날 두 달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었다. 지하철 벽으로 몸을 돌리고 누가 볼까 새끼손가락으로 눈 안쪽을 꾹꾹 눌렀다.
"예지야 무슨 일인 지 설명을 해줘 봐."
M은 내가 두서없이 던지는 단어 구토를 들어줬다.
"내가 봤을 때는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봐봐, 네 라인매니저님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하셨잖아. 그럼 이제 전달력만 조금 아쉬운 거 아니야?"
"... 응."
"우리가 같이 했던 프로젝트도 아직 회자될 정도로 좋게 평가받았잖아. 내가 본 예지는 되게 똑똑하고 성실한데. 너 말대로 쓰레기처럼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
"응."
"그리고 아니, 피앤지 좋은 회사인 거 다 알지. 그런데 휴지 만드는 회사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울어! 떨어져도 다른 곳 지원하면 되지. 예지는 모셔가지."
"응..."
잠시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근데 오빠, 피앤지 휴지 안 만들어."
"크리넥스 피앤지 거 아니야?"
"그거 유한 킴벌리일걸?"
시간은 공평하고 무심하여 내 조급한 마음은 무시하고 마지막 날로 흘러왔다.
발표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수십 번은 반복한 설명이라 단어들이 버터처럼 입에서 흘러나왔다. 잠 없는 밤을 보내며 걱정에 휩싸여 고민했었던 시간 덕분에 질문들도 예상 가능한 범주 내의 것들이었고, 답변용 자료도 전부 준비되어 있었다.
인턴들 중 내 발표가 가장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미리 여의도의 호프집에서 뒤풀이를 시작했다. 나는 - 어쩌면 마지막으로 - IFC 건물을 흐느적흐느적 빠져나왔다.
작년에 내가 이곳을 보며 설렜다니! 믿을 수 없었다.
오늘은 이 장소가 콘크리트 감옥처럼 느껴졌다. 건물 앞 흡연장은 한숨을 제작하는 공장 굴뚝처럼 보였다.
내가 발표를 끝내고 나온 시간인 7시 45분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저녁을 먹고 돌아가거나 어디론가 바쁘게 이동하는 금융맨들을 관찰했다. 그들도 전혀 설레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무언가를 시작해 본 건 언제였을까?
술자리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발표한 자료를 다시 꺼내봤다.
고마운 사람들의 흔적이 느껴졌다.
매일 거의 한 시간씩 시간을 내주신 라인 매니저님,
힘들 때 힘이 되어준 인턴 동기들,
필요한 자료나 정보를 모두 기꺼이 찾아주신 브랜드 매니저님들,
조언이 상충될 때는 내 신념으로 밀고 가라는 조언,
함께 식사하며 응원해 주신 많은 분들,
가장 힘들 때 힘이 되어 준 M,
멋진 여름을 만들어 준 소수의 친구들!
그렇게 두 달이 끝났다.
일주일 뒤, J는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