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대기업 취업기 한국피앤지 P&G 취준 후기
J가 독일로 떠나기 삼일 전, S와 셋이 새내기 때부터 자주 다녔던 단골 바에 가기로 약속했다.
S는 가장 선망하던 직종에서 채용전환형 인턴십을 하는 중이었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 팀 사람들은 다 XX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나도 너무 들어가고 싶은데 우리 팀에서 나만 인턴이니까 XX를 못 들어오게 하더라고. 아직 내게 신뢰가 없는 거겠지?
그래서 내 목표는 퇴사 전에 XX 들어가기야."
J가 말했다.
"그 목표, 포스트잇에다가 크게 써서 컴퓨터 앞에다가 붙여 놔! 엄청 귀엽게 보실 것 같은데: 퇴사 전 목표 - XX 들어가기!"
내가 반박했다,
"아니 그 정도면 시위하는 거 아니야? 진짜로 하면 웃기겠다."
J가 대답했다.
"그런데 나 비슷한 거 한 적 있어.
아니, 내가 하던 일은 사실 여부가 되게 중요하거든? 그런데 한 번은 내가 확인을 안 하고 자료를 넘긴 거야.
이사님이 나 혼내시면서 - 'J! 다음부터는 팩트체크 필수입니다?' 이러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포스트잇에다가 핑크색으로 엄청 크게 팩. 트. 체. 크. 이렇게 적어놨어."
난 조금 놀랐다.
"진짜? 사람들 보이는 데다가?"
"응! 이사님이 막 놀리시면서 'J, 나 보라고 이렇게 해 놓은 거야?' 하시던데?"
내가 알던 J는 사실 그렇게 꼼꼼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1년간 다닌 직장에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아직도 부서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들어서 그녀가 많이 성장했다는 건 유추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왈가닥이 (물론 나도 좀 그랬지만) 이렇게나 노력한 에피소드를 직접 들으니 놀랍고 기특했다.
내가 나름의 전투를 싸우는 동안, 각자의 위치에서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었구나.
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 지 고민된다면, 위 직급의 상사를 관찰하라는 조언을 들은 적 있다. 그 또는 그녀가 영위하는 삶과 커리어가 닮고 싶다면 남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떠나라는 이야기.
피앤지에는 닮고 싶은 사람이 많다.
그분들도 우리 나이에는 이렇게나 미숙했을까? 계단식 성장을 견뎠을까?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인턴십을 종료하고 4일쯤 지났을 때,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어 푹 쉬면서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들이었다.
그때 부서장님께 문자가 한 통 왔다.
"예지님! 잘 지내고 계셨어요?"
전혀 잘 지내고 있지 않았다.
"네! XX님은요?"
"저도 잘 지내고 있었어요. 예지님! 두 달간 너무 고생 많았어요."
부서장님께서는 오분 정도 내 인턴십동안의 퍼포먼스에서 좋았던 점, 그리고 개선하면 좋을 점을 말씀해 주셨다. 귀담아들으면서도, 이 뒤에는 합불 여부를 공개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점점 초조해졌다.
"그래서, 사실 이 전화의 진짜 목적은...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인데요!"
이마로 피가 확 쏠렸다. 됐다!
"중간발표 때까지도 열심히 해주셨지만,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피드백을 수용하고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지님이 앞으로도 더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됐고, 그래서 결정이 더 확실해졌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거듭 감사를 전하고, 입사 날짜를 정한 다음에 전화를 끊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엄마가 울고 계셨다. 엄마를 꼭 안아드렸다. 엄마가 키가 작아지신 건지, 내가 키가 커진 건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행복했던 날은 한 손으로 셀 수 있다.
J가 떠나기 전 날이었다.
우리는 8년 전처럼 동네를 누볐다.
시작에는 힘이 있어서, 어떤 관계든 한 번 시작된 이상 처음에 정해진 방향으로 가속도가 붙는다. 얘들을 만나면 항상 17살처럼 행동하게 된다.
나의 시작이 종료됨과 동시에, J는 J의 시작을 위해 출발한다.
시작은 이십 대 초반의 의무이고, 동시에 특권이다.
하나의 시작이 끝나면 다음 시작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지난 몇 년을 보내고 그 기로의 종착점에 선 지금, 난 작은 깨달음을 한 가지 얻었다.
시작이 주는 설렘으로 일정기간은 추진력을 낼 수 있지만,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한시적이고 어리석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를 이루는 것은 시작이 아닌 과정이다. 함께 발전해 온 내 친구들처럼, 그리고 나름대로 고단했던 내 취준 과정처럼!
나를 과거에 맸던 기억들이 희미해진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괴로웠던 질문에 운명이 - 사실 내가 - 몇 년에 걸쳐 서서히 답을 준다.
이제는 서서히 이 시작 중독에서 벗어날 때라는 신호가 들려온다.
J도 그러하길 바랐다.
그녀의 앞길이 마냥 안온하지만은 않길 바랐다. 많이 강해진 J에게 걸맞은 과제와 시련이 주어지길, 그리고 그 과정이 그녀의 풍부한 잠재력을 만날 수 있는 길이길 바랐다.
왜냐하면 J는 이미 뭐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해! 건강하게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