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부부의 자작캠핑카 타고 유라시아횡단 신혼여행기 18탄
2024년 4월 2일 화요일, 볼고그라드 2일차, 에어컨 사망선고와 한달만의 세차
에어컨을 살릴 수 있을까 싶어 얀덱스에서 여러곳을 검색한 뒤 연락처에 나온 왓츠앱이나 텔레그램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가능하다고 해서 어렵게 찾아간 곳에는 정비소는 나오지 않고 주택가 속 거대한 철문만 있었다. 차를 세우고 두리번대니 이내 주인이 나왔다. 어쨌든 여기가 맞긴 맞아서 간단히 정비를 해주셨고 에어컨은 완전히 망가졌다는 선고를 받았다. 비용은 받지 않으셨다. 무뚝뚝한 듯 잘 챙겨주는 러시아 사람들..ㅎㅎ
시베리아의 추운 겨울은 열심히 대비했지만 그 이후 더위는 크게 대비를 안했던 것 같다. 전체 여행 중 시베리아 겨울은 단 한 달일 뿐인데ㅎㅎ 어쩔수 없지! 여행은 갑작스레 맞닥뜨리는 나쁜 일로부터 회복탄력성이 빨라지는데 도움이 된다.
우릴 엄청 환영해준 맘씨 좋은 세차장
레디가 시베리아를 달리며 뒤집어쓴 진흙과 먼지를 없애기 위해 목욕을 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대형 세차장이었는데 3.8미터 높이 트럭까지 실내 세차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손세차 비용은 단 900루블, 한국돈으로 하면 14000원 정도로 한국에 비해 매우 싸다. 러시아 인건비가 싸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큰 환대를 받았다.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횡단 여행자들을 이해할 수 없어하는데 그보다는 신기해한다는 표현이 맞다. 왜 그걸 하지?? 라는 느낌. 아무튼 그들은 우리를 매우 환영하며 온갖 선물을 줬다. 티셔츠와 각종 세차용품, 세차도 선물로! 우리도 무언가 주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한국돈 만원 뿐 ㅎㅎ 기념으로 드렸다…
볼고그라드 돌아보기
오후에는 볼고그라드의 두번째 날을 즐겼다. 더할 나위 없는 날씨와 함께 여행지를 놀러다녔다. 러시아는 특히 전승기념물이 많은데 그걸 볼때 기분은 좀 복잡하지만 전쟁 속에 희생된 많은 이들을 생각하며 한바퀴 돌아보았다. 볼고그라드는 과거 스탈린그라드로 불렸다. 2차세계대전 기간 중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독일-소련 전투가 여기서 있었다. 거대한 기념비를 비롯, 추모관, 공원 전체에 걸친 조각상들이 있다. 산책로와 좋은 전망때문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자세한 설명은 구글맵에서 보면 된다.)
The Motherland Calls
Volgograd, Volgograd Oblast, 러시아 400005
때마침 봄이 시작될 때였다
희생자의 이름이 빼곡한 추모관, 아름답게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오후에는 전날 보아둔 노천카페에 앉아서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밀린 SNS를 했다. 그동안 가속도가 붙었던 횡단 여행에 잠시 가진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늘 운전하느라 음주에 제약이 큰 하나에게 이런 날은 마음이 편한 날이다. 시장도 구경하고, 한적한 오후 볼가강도 다시 걸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으로 레스토랑에서 맥주 한잔을 하기로 했다. 어제 묵었던 성당 앞 주차장은 매우 안전하고 터치도 없어서 2박3일간 잘 지낼 수 있었다. 이제 오늘 밤이 지나면 러시아를 떠난다.
충동적으로 들어간 스테이크 하우스라는 레스토랑은 우리가 갔던 곳 중 역대급으로 비쌌으나(지금 생각해보면 러시아만큼 음식 싼 곳이 없음) 사순절 음식이라는 후무스(러시아는 이 기간 사순절 메뉴를 파는 식당이 많다)와 로스트치킨은 매우 맛있었다. 게다가 양이 많아서 남은 것을 싸왔고 다음날 아침으로 먹었으니 일석이조! 이렇게 선선하고 아름다운 볼고그라드 2박3일이 저물었다. 우리는 평온히 조지아로 넘어갈 줄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맛집이다.
2024년 4월 3일 수요일, 국경까지 800km
아침 일찍 출발했다. 최대한 진도를 빼고 목요일에 국경을 넘는것이 목표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목요일에 국경에 도착한 건 가장 잘한 일이다. 우리가 금요일에 도착했다면 꼼짝없이 주말을 국경에 갇혀 보냈겠지. 아침엔 대형마트 렌타에 들러 생존식량을 샀다. 어느날 렌타에서 우연히 비비고 만두를 발견한 이후 우리는 렌타에 갈때마다 비비고를 싹쓸이했다.
저녁 무렵 한 마을에 도착했다. (너무 피곤해서 마을 이름도 저장을 못했네…) 잠을 자보려 시도했으나 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심지어 이 구간부터는 트럭카페도 찾기가 어려워서 샤워도 못한채 이동했다.
날이 어두워졌지만 좀더 잘만한 카페를 찾기 위해 40키로 정도 더 이동하여 <라 포레스타>라는 외딴 트럭카페를 찾았다. 러시아 답지 않은 이름이다. 여기서부터는 할랄푸드를 팔거나 무슬림들이 종종 보인다. 아침에 본 것이지만 여기에는 기도실도 따로 있다.
너무 배가 고픈데 핸드폰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 곳이라 번역기도 안 돌아갔다. 손짓 발짓으로 겨우 주문한 만두와 소고기스튜, 빵, 볶음밥 등은 모두 대실패했다ㅋㅋㅋ 어쩔수 있나? 음식을 마구 우겨넣고 잠을 청했다. 외딴 카페이지만 인근(전방 40키로 카페 전멸)에 이런 곳이 없어서인지 저녁 내내 여러 손님들이 방문했다.
자다가 차가 너무 흔들려서 깼다.
시간은 자정도 넘지 않은 시간, 일본 태풍에서도 겪지 못한 역대급 강풍이었다. 태양광이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강풍, 우리는 그때부터 온갖 예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강풍 경보가 떠 있었고, 우리가 여기서 이동하는 것이 더 위험해보였다. 결국은 버티기로 결정했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때의 심경은 아이패드 영상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날 밤,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려면 뭐라도 하라는 것을 배운것 같다. 나는 아주 찬물로 머리를 감았고(동영상도 있지만 너무 궁상맞아서 못 올림ㅋㅋ), 타로카드를 꺼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질문했다. 하나는 노래를 부르라고 하고 나는 꿈을 잃지 말라고(?) 하는듯한 알쏭달쏭한 결과를 받아들었다. 아무튼 동요하지 말자는 뜻 같았다.
이러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갔는지 강풍이 약간 잦아들었다. 우리는 잠자리를 아래로 옮겨 잠을 청했다. 위의 벙커베드는 높아서 흔들림이 2배거든. 그 이후로 차는 계속 흔들렸지만 왠지 좀더 편히 견딜 수 있었다. 어느새 큰 트럭 한대가 우리 옆에 서 있었다.(매우 안심된다는 뜻)
그렇게 시베리아 횡단의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2024년 4월 4일(목), 국경도시 블라디캅카스, 그리고 조지아 국경가는 길
이날은 ‘운수 좋은 날’이었나 싶다. 아침에 동이 트니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쾌청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드디어 봄을 따라잡았다는 생각에 들떠서 우리는 차를 세워놓고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아래는 그 결과물.
내가 좀더 몸을 내밀었어야…
잊을 수 없는 시베리아의 마지막 아침
가다보니 어느 마을로 들어섰는데 먹음직스러운 과일과 채소를 팔고 있었다. 농가에서 직접 기른 것을 내놓은 것이다. 사과를 큰 봉지에 가득담아서 5천원, 그 외에도 신선한 토마토, 오이도 샀다. 사과가 정말 맛있었고 거의 매일 먹었는데도 3주 정도 갔던 것 같다.
기름값 저렴한 러시아에서 막판 주유도 해야겠지? 주유를 하고 계산하러 가게에 들어가니 카운터에 군밤같이 생긴게 놓여있길래 사가고 싶은 마음에 이게 뭔지 물어봤다. 그런데 계산해준 소녀가 다 먹으라고 통째로 주는 것 아닌가? 알고 봤더니 대추야자였는데 얼마나 맛있었는지 야금야금 며칠동안 간식으로 먹었다. 게다가 어쩌다 엄청 맑은 우물까지 찾아 청수까지 채웠다.
그 뿐만이 아녔다. 블라디캅카스까지 가는 길에는 분쟁지역이 있기에 우리는 여길 지나가면 벌금을 물거나 재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직선 코스가 아닌 지도상 좌측으로 우회해서 가야만 하는데, 네비를 봐도 헷갈려서 어느 순간 가면 안되는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보통 여기서 모르고 쭉 가다가 벌금이나 약식재판으로 간 여행자들이 있는데, 그 순간 한 군인이 차를 세우더니 여긴 가면 안된다며 우회로를 친절히 알려준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꼼짝없이 걸렸을 것이다. 검문이 많은 지역이다.
그럼에도 우회로는 마지막까지 엄청 멋졌기때문에 전혀 고생스럽지 않았다.
시베리아의 양떼들
잘 있거라 시베리아
드디어 마지막 도시, 블라디카프카스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내내 카즈베기산이 웅장하게 펼쳐진다. 우와! 저기를 드디어 가는구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횡단 이후 처음 넘는 국경 앞에서 잘 해내기 위해 야무지게 밥을 챙겨먹었다. 마지막으로 또! 장도 봤다.
이때가 좋았다
카즈베기 산 너머 조지아
그렇게 우린 4월 4일 오후 3시쯤 러시아 국경을 향했다. 길게 늘어선 트럭이 보이면 국경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다. 트럭을 쭉 지나쳐 국경에서 출국심사를 받았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문제없이 잘 통과했다. 터널인가 동굴인가 싶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 조지아 입국 보더가 나온다. 펄럭이는 조지아 국기를 보며 자신있게 입장했다.
그 후 우리는 러시아도 조지아도 아닌 이 곳에서 24시간을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