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리사이틀홀은 유난히 소리의 윤곽이 또렷한 공간이다. 잔향이 과하게 미화하지도, 건조하게 해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홀에서는 연주자의 미덕과 약점이 비교적 정직하게 드러난다. 오늘 우리가 리사이틀홀에서 들은 건 피아니스트 안은유의 귀국 피아노 독주회였다. 와이프와 같은 전공으로 서로를 알아본 친구, 그리고 서원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더 가까워진 인연. 인생은 묘하게도 이렇게 연결된다. 아이 간식과 감기약 얘기를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술의 전당 무대 위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를 흔들어 놓는다. 음악이 끝난 뒤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울림이 마음 한가운데 남아, 결국 그 여운에 등을 떠밀리듯 키보드 앞에 오랜만에 앉았다.
안은유 님은 예술의 전당 영재 아카데미 수료, 예원학교·서울예고를 거쳐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악대학교에서 학·석사를 마쳤고, 이후 쾰른 국립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최고점으로 졸업한 연주자다. 이후로 유수한 콩쿠르 에서 연이어 우승하고 솔리스트로서 국내외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력만으로도 선명한데, 오늘 무대에서 더 분명했던 건 그 모든 훈련이 해석의 밀도와 음색의 통제력으로 환원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프로그램은 시대와 언어가 극단적으로 다른 네 곡으로 구성되었지만, 안은유 님은 그 간극을 감각적으로 봉합했다. 네 곡은 따로 노는 레퍼토리 나열이 아니라, 피아노라는 악기가 가질 수 있는 표현의 스펙트럼을 한 사람의 손 안에서 점진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구성이었다.
1.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No.12 in A-flat major, Op.26
첫 악장부터 변주로 시작하고, 이어서 스케르초, 그 뒤를 잇는 장송행진곡이 중심을 이룬다. 안은유 님은 건반 위에 죽음의 엄숙함과 삶의 찬란한 유희를 동시에 새겨 넣었다. 주제는 단정하게 제시되었고, 음형이 촘촘해지는 순간에도 결이 쉽게 흐려지지 않았다. 장송행진에서는 감정을 앞세워 비극성을 과장하기보다, 절제된 리듬과 묵직한 걸음으로 음악을 세웠다.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이 남았다. 숨이 막히는 3악장을 지나고, 4악장에서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베토벤 특유의 긴장과 무게를 놓치지 않았다.
2. 리스트: Après une lecture du Dante (Fantasia quasi Sonata, S.161 No.7)
변주와 장송의 미학을 다룬 베토벤의 곡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곡을 다음 곡으로 가져오셨다. 리스트의 단테소나타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표현할 수 있는 지옥의 아수라장과 천상의 구원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인 광기 어린 걸작이다. 그리고 안은유 님은 피아노라는 악기를 태워 지옥의 불꽃을 재현하고, 그 잿더미 속에서 천사의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이 곡이 가진 초절기교와 극단적인 감정의 진폭이 객석까지 밀려왔고, 그 중심에 선 안은유 님의 에너지가 정말 대단했다. 손끝만이 아니라 온몸 전체로 곡을 끌고 가는 듯한 몰입이 있었고, 그 격정이 과장된 몸짓으로 보이지 않고 음악 자체의 추진력으로 느껴졌다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다.
낮은 음역에서는 지옥의 문이 열리는 듯한 어둡고 묵직한 울림이 살아 있었고, 높은 음역으로 치솟을 때는 날카롭고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그런데 그렇게 거대한 대비 속에서도 소리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빠른 패시지에서는 숨이 막힐 정도로 화려했지만, 그 안의 결은 살아 있었고,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긴장이 무너지지 않고 계속 축적되었다. 그래서 폭발하는 순간에는 단순히 세게 친다는 인상이 아니라, 지금 이 음악이 여기까지 와야만 했다는 강한 설득력이 생겼다. 화려함만으로 끝나는 리스트가 아니라, 기교와 열정이 하나의 거대한 서사처럼 밀어닥치는 리스트였다. 무엇보다도 압도당했다. 정말 전율했다.
3. J. Widmann: Elf Humoresken
2007년에 발표된 이 곡은 현대 피아노 레퍼토리 중에서도 매우 영리하고 감각적인 작품이다. 요르크 비트만의 작품은 익숙한 피아노를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끼게 만든다. 낯설고, 때로는 장난스럽고, 또 불안할 만큼 예민하다. 안은유 님은 그런 현대곡의 낯섦을 어렵게만 남겨두지 않고, 긴장과 침묵, 돌발적인 움직임들을 또렷한 흐름 안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날 가장 강렬하게 남은 순간이 여기 있었다. 낯선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더니, 클라이맥스에서 높은 음역을 훑어 올라가더니 그대로 피아노 오른쪽 프레임을 손으로 내리쳤다. “텅-” 홀 전체가 한순간 멈춘 듯했다. 클래식 공연에서 악기를 직접 타격하는 장면을 처음 본 나로서는 정말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은 전혀 억지스럽지 않았다.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피아노라는 악기가 낼 수 있는 소리의 경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악기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경험, 바로 그런 충격이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한 번의 타격으로 공간의 공기까지 바뀌는 듯했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4. 라흐마니노프: Variations on a Theme of Corelli, Op.42
이 곡은 앞선 베토벤, 리스트, 비트만의 3곡의 요소가 기묘하게 섞여 있으면서도,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말년의 고독과 정제된 슬픔'이 극치에 달한 작품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3번의 두껍고 화려한 화상이 이 곡에서는 많이 걷어내졌다. 훨씬 날카롭고, 건조하며, 현대적인 불협화음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안은유 님은 라 폴리아의 20개의 변주가 이어지는 동안 청중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극도로 치밀한 설계도를 그려온 듯했다. 각 변주를 따로 떼어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기보다, 서로 다른 표정들이 하나의 큰 흐름 속에서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음악이 조급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게 스며들었다. 강한 부분에서도 소리를 거칠게 밀어붙이기보다 울림을 깊게 만들어내는 쪽에 가까웠고, 그 덕분에 낭만성이 과장된 감정이 아니라 내면의 진동처럼 전해졌다. 화려하게 끝나는 일반적인 변주곡들과 달리 이 곡은 아주 쓸쓸하고 조용하게 사라지듯 끝나는데, 그 마무리가 무척 긴 여운을 남겼다.
4개의 곡에 대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흥미로운 공통점이 발견된다. 베토벤 12번은 변주곡으로 시작하는 소나타, 리스트 단테는 환상곡풍의 소나타, 비트만은 파편화된 소품집, 라흐마니노프 코렐리는 엄격한 형식의 변주곡. 안은유 님은 기존의 형식을 비틀거나, 단순한 형식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곡들에 매력을 느끼시는 것 같다. 독주회의 숨겨진 부제는 혹시 "피아노라는 악기의 한계에 도전하다"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