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께서 나누고 싶어하시는 내용이 몇 개 있네요. 지난 번 글에서 '애통하는 자'에 대해, 또 더 지난 번에서는 가톨릭의 '연옥'에 대해 궁금해 하셨구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가 무엇인지 물어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 독자 중에 목사님이 여러 분, 강도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권사님도 계시고 심지어 종교학자도 계시는데 제가 나선다는 게 참으로 주제넘은 짓인 줄 잘 압니다. 하지만 답을 한다기보다 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오늘은 애통해 한다는 게 무엇인지 나누어 보기로 해요.
찾기 편하시라고 저의 지난 글을 다시 올립니다.
https://blog.naver.com/jasengmain/222682356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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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슬퍼하고 가슴아파 한다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가서, 소중한 무엇을 잃어서 슬프고 가슴아픈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를 돌아볼 때 슬프고 가슴아픈 것을 말합니다.
자기연민이냐고요? 아니요. 그것과는 다르지요. 자기연민이란 자기는 원래 이런 처지에 있지 않아야 할 사람인데 이런 꼴을 당했으니 스스로가 불쌍하다는 거잖지요. 왜 하필 나냐는 거잖아요. 일종의 교만이지요. 자기자랑과 똑 같은 교만이지요. 왜냐구요?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사람이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니까요.
애통해 한다는 것은 존재의 나약함에 대한, 한계에 대한, 딴에는 몸부림을 치지만 돌아보면 늘 그 자리인 실존적 한탄이자 통렬한 자기 성찰입니다. 나아가 노상 그러고 있는 그 못난 자기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되 '미워도 다시 한번' 보듬는 것을 말합니다.
매번 넘어지고, 넘어진 줄도 모르고 넘어지고, 넘어지고 나서야 넘어진 줄 알고, 다음부턴 안 넘어져야지 하고는 또 넘어지는 소망없고 한심한 자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자기,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는 사도 바울의 애통이 곧 우리의 애통인 거지요. 이어서 바울이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며. 애통함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바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최진사 댁 셋째 딸을 차지한 칠복이 놈 마냥, 여덟 가지 복 중에 하나가 맞은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그게 복이냐고요?
자기를 돌아보는 용기가 있다는 점에서. 자기의 나약함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래서 위로를 받고 고침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라면 단번에 그만 두면 될 텐데, 안 하면 될 텐데 그게 안 되잖아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죠. 주인이 왜 주인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주인아닙니까.
저는 제 인생이 제 맘대로 안 되서 급기야 주인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제가 주인인 줄 알았는데 착각했더라구요. 그래서 주인자리를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새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새 주인, 원래 주인의 완벽한 리더십을 완벽하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