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까지 거의 책 한 권 분량의 죽음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 죽음을 앞 둔 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다보니 점차 관심이 깊어져서 죽음에 관한 공부를 계속하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제 자신의 죽음을 그전보다 가깝고 친근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른 공부를 이만큼 했으면 그 내용에 익숙해지고 더러 체화되기도 할텐데 가성비가 낮다 못해 제로에 가까운 공부가 바로 죽음 공부 같습니다. 살아있는 한 언제까지나 살 것만 같단 말이죠. 몸의 60조 개 세포 중 어느 하나도 죽을 거라는 생각은 죽어도 안 한단 말이죠.
퀴블러로스가 관찰한 죽음의 5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중 4단계까지는 표현만 다를 뿐 모두 죽음을 거부하는 모습이죠.
퀴블러로스 또한 죽기 전 같은 단계를 밟는 걸 보고 지켜본 사람들이 놀랐다죠. 당신은 안 그럴 줄 알았다면서. 부정, 분노, 타협, 우울 과정 없이 단박에 수용할 줄 알았다면서. 그 때 퀴블러로스 왈, "지금까진 다 남의 죽음이었잖아. 막상 내 죽음이 닥쳐 봐, 그게 되나."이러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퀴블러로스가 수용의 단계로 나갔는지 못 나갔는지 우리로선 애매한 거죠.
지난 시간에 제가, 죽어가면서 진정 죽음을 수용할 수 있다면 삶과 죽음이 동시에 완성된다고 했지요. 그게 무슨 소린지 정신과 의사이자 사상가인 스캇 펙의 말을 들어보지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도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부정한다. 그 중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는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성숙해진다. 이럴 경우 그들은 일생 동안 회피해온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기도 한다. 죽음에 이른 순간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기쁨이자 특권이다. 임종 시의 고백과 대화는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용서와 화해를 이루며 커다란 성장을 불러온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진실해지고 아주 빠르게 결정한다. 죽음이 배움과 영혼의 성장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수용의 단계로 나갈 수만 있다면 일생 꼬여있던 문제가 그 순간에 풀릴 수도 있다는 거지요. 흔히 "내가 이것 때문에 눈 못 감는다, 천추의 한이 될 것 같다"던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된다는 거지요. 저 또한 죽기 전까지 붙들고 가야 할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 앞에서, 죽음을 순순히 수용하는 순간 녹아질 수도 있다는 의미인 거지요. 생각만으로도 기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용 단계로 나갈 수 있느냐는 건데요, 한 마디로 자아를 놓아버릴 때 가능합니다. 이 단계의 축복은 자아를 벗고 영혼을 입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부여됩니다. 4단계까지는 같은 차원에서 심리 상태만 달리하며 맴도는 상황인 반면, 5단계는 차원을 달리하는 '도약'입니다. 애벌레가 나비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은.
애벌레라는 자아적 존재가 나비라는 영적 존재로 변환이 될 때 비로소 5단계의 죽음 축복을 맞이하게 되는 거지요.
그럼 자아로서의 나는 뭐며, 영혼으로서의 나는 뭐냐? 다음 시간에 계속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