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그후 9 / 재난 앞에서 구차하게 피하지 말라

집으로 9

by 신아연


내가 어릴 때 엄마가 점을 쳤는데, 나는 40살이 넘어서 말과 글로 먹고 살 거라고 했단다. 지금 50은 옛날 40이라고 해도 무방하니 점괘가 얼추 맞았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될지도 물어보셨어야지. 점쟁이 말이 맞기는 맞았는데, 50살에 이혼한 후 말과 글로 먹고 살게 될 줄이야.


하긴 아무려면 어떠랴. 이만큼 살고 나니 내가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생이 나를 어딘가로 끌어간다고 느끼게 되었으니. 그러니 생의 손목을 잡고 어디든 이끌려 가야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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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서 중앙일보에 실린 '내 글'이 나를 마중 나왔다면, 같은 날 새벽 시드니 공항에서는 '내 말'이 나를 배웅했다. 무슨 소리냐면 출국 수속을 하는데 누군가가 나를 알아봤다. “작가님, 한국 가세요? 기억 못하시겠지만 서울의 한 모임에서 뵌 적이 있어요. 저는 시드니 출장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구요.” 한국에서 책을 내고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참석했던 사람인 모양이다. 하필 이런 쪽 팔리는 타이밍에.


두 공항에서의 경험을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또한 의미로 다가온다. 점쟁이 말처럼 이제부터 말과 글로 살게 될 거라는 암시처럼.


내 글이 실린 신문을 거머쥐고 바퀴 가방 두 개를 이리저리 힘겹게 끌며 (내가 가방을 끄는 건지, 가방이 나를 끄는 건지) 비척거리면서 청사를 나와 공항버스를 탔다. 무사히 몸을 실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상황은 더욱 난감했다. 절정은 지났다 해도 여전히 퇴근 시간대 끝자락과 맞물려 큰 가방을 두 개나 들고 시내버스를 탄다는 것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택시를 탈 형편도 아니었다. 친정은 기본요금에서 조금 더 나오는 거리였지만 돈을 그렇게 써서는 안 되었으니까.


이런 내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공항버스는 서울대 입구에서 나를 내려둔 채 쌩 하니 제 갈 길로 가버렸고, 상황 판단을 했을 때 저녁을 먹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다. 마침 내린 자리가 바로 분식집 앞이었다. 제일 싼 음식이 2천 원짜리 김밥이었다. 이때부터 3년 정도를 나는 거의 김밥을 먹었다. 외국으로 이민을 갔을 때 공항에 마중 온 사람의 직업에 따라 일자리가 구해진다는 말이 있지만, 공항에서 내렸을 때 처음 먹은 음식에 따라 줄창 그것만 먹게 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음에도.


어느 새 밤 9시가 가까워오면서 거리에는 어둠이 깔렸다. 11시간 비행의 노곤함과 포만감이 몰려오면서 트렁크에 기대어 그대로 길에서 잠들고 싶었다. 아예 가방 따위는 버리고, 나 자신도 버리고 홀연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한국의 가족들이 나를 짐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소중할 것 하나 없는 낡고 긁힌 보퉁이 같은 비루한 존재, 그것이 가족들 눈에 비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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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면에는 ‘재물 앞에서 구차하게 구하려 말고, 고난 앞에서 구차하게 피하려 말라’고 한 『예기』의 임재무구득, 임난무구면(臨財無苟得, 臨難無苟免)이 새겨져 있다.


나는 위태로울 정도로 돈이 없고, 바닥이 흔들릴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지만 허덕이거나 버둥거리지 않았다. 없으면 굶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각오했더니, 굶지도 죽지도 않고 지금까지 멀쩡하다. 오히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간다.


지난 번 글에 야반도주하듯 집을 나왔다고 했지만 그건 그냥 하는 소리고, 나름 용의주도한 계획 하에 실행에 옮겼다. 마치 이승에서 작별을 고하듯 25년간의 결혼생활, 21년간의 호주살이를 정리하는 비장한 각오로.



집을 나오기 전 꼬박 한 달간을 집 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데 보냈다. 옷가지와 세간살이, 서류정리, 책장의 책들도 솎아 냈다. 부엌의 기름 때, 욕실 물때는 물론이고 사방의 벽과 심지어 천장까지 훔쳤다. 나 없이 혹시 이사할 것에 대비해 꼭 가져가야 할 것들, 꼭 안 가져가도 되는 것들,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고 아니면 말 것들을 구분하여 미리 이삿짐도 챙겨두었다.


휴지, 치약, 치솔, 비누 따위 생필품은 1년간은 쓸 수 있도록, 음식은 둬도 상하지 않는 것들로 공간이 허용하는 한에서, 그리고 몇 가지 상비약도 챙겨뒀다. 주부가 없는 공간, 빨래를 자주 못할 것에 대비해 남편과, 집에 있지는 않지만 아이들의 속옷과 양말도 서랍장 넉넉히 새로 채우고, 세탁소에 맡길 것은 맡기고, 세탁기를 수차례 돌리고, 손빨래 할 것은 따로 해서 정갈하게 다림질을 했다. 남편의 안경 닦는 천까지 조물조물 빨아뒀으니 더 말해 무엇하리.


그러느라 심신의 에너지는 더 소진됐고 수중의 돈은 더 줄어들었다. 그러니 비행기에서 내려 짐 가방을 들고도 택시 한 번을 못 타고, 몇 년 간 내리 김밥만 먹었지.


어떤 사람은 이혼을 하면서 화장실에 걸려있던 휴지, 세면대의 쓰다 남은 치약까지 내가 가지네, 네가 가지네 하고 치열하게 싸웠다고 하지만, 나는 심지어 결혼 때 받은 반지와 목걸이도 고스란히 놓고 나왔다. 혼자 살게 되면 동전 한 푼도 아쉬워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나온 것이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된다.


인당수에 빠지기 전, 마지막으로 심 봉사를 봉양하는 심청이 마냥 내가 한 ‘짓거리’를 두고 어느 지인은 “집 나가는 년이 보리방아 찧어놓고 간다더니…” 하면서 기가 막히고 불가해(不可解)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지만 ‘임재무구득, 임난무구면’이면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그때도 믿었기 때문이다.


<10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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