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그후 10 / 거세당한 일상

집으로 10

by 신아연


사마천(司馬遷)


박경리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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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스스로를 가두고 언감생심 나는 이 시에 의지하여 글을 써왔다. 박경리가 사마천을 생각했듯이, 나는 박경리를 생각했다. 일상을 거세 당한 것처럼 나는 더 이상 사랑의 기억도 없이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썼고, 외로움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 밥 먹는 자리가 글 쓰는 자리고, 글 쓰는 자리에서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나는 독방에 감금된 수인이었다. 나갔다 돌아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간수가 등 뒤에서 감방 철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숨이 턱 막혔다. 옷도 벗지 않고 씻지도 않고 구겨진 휴지처럼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한 동안 불면증으로 고생했다).


형벌 중에 가장 무섭다는 독방 감금에 처할 정도로 내 죄가 무거운가를 억울해 한 것도 죄수들과 비슷하리라. 대학생 때 아버지가 한 차례 귀휴를 다녀가신 적이 있었다. 무기수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휴가, 20년 20일을 복역한 후 88년 올림픽 특사로 가석방되시기까지 내 기억으로는 두 번 집엘 다녀가셨다. 아버지는 마치 퇴근 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무소에는 죄 지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 억울하다는 사람뿐이지.” 라고 무심히 말씀하셨다. 마치 상처 준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상처 받은 사람만 있는 것처럼.


나도 억울했다. 상처는 내가 받은 것 같은데, 벌 또한 왜 내가 받는단 말인가. 언니들이 이따금 씩 “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그 좁은 방에 있을 거냐, 설마 평생 있으려는 건 아니겠지?”라고 성급한 말을 쏟아낼 때면 마치 아버지처럼 나도 무기수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독방 수감 생활은 하지 않으셨으니 나는 아버지보다 더한 징역살이였다고 할지.


돌이켜 보면 혼자 지낸 지난 7년이 내게는 ‘거울 만들기’였던 것 같다. 거울 공장에 다닌 건 아니고 생각이나 마음이 극단에 치우치거나 균형 감각을 잃지 않도록 정직한 내면의 거울을 닦아 왔다는 의미다.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마음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사색을 하는 것이 내게는 곧 거울 만들기 작업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거울이 없는 사람이다. 자기를 비춰 줄 가깝고 친밀한 옆지기가 없기 때문에 피해의식에 시달리거나, 자기 연민 혹은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모든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거나,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 하거나, 스트레스 상황에 파괴적,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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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열



흔들리는 중년의 삶을 주제로 한 황순원의 소설 『내일』에는 이빨 사이에 낀 고춧가루 때문에 실연을 당한 작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빨 사이의 고춧가루’가 실연의 빌미 이상으로, 내게는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이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나 비감 어린 정체성의 표상처럼 다가온다.


오래 전 얘기다. 여러 쌍의 부부가 주축인 식사 자리에서 아내를 여읜 한 중년 남자가 있었는데 식사를 마친 후 담소를 하면서 그의 이빨 사이 고춧가루를 보게 되었다고. 그러나 모두들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민망해 할 뿐,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그 남자의 아내가 있었다면 남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재치 있게 지적해줬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남편이나 아내가 있는 사람은 거울이 없어도 식사 후 “나 이빨에 뭐 낀 거 없어?” 하고 서로에게 물어볼 수 있고 “당신 이 사이에 고춧가루 끼였네.”라며 스스럼없이 말해 줄 수 있다. 흔히 부부를 서로를 비추는 거울에 비유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부부는 문자 그대로 서로의 거울이다. 남들은 모두 거울이 있는데 나만 거울이 없다면 얼마나 난감할까. 더구나 그 누구도 자신들의 거울을 내게 비춰주지도, 빌려주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면 더욱 폭폭한 노릇이다.


혼자 사는 일이 그렇다. 자기 속으로 침잠에 침잠을 거듭하고 혼자의 생각 속으로 빠지고 또 빠져들 때나, 정 반대로 휘젓고 다니며 어지러운 인간관계 속에서 소위 ‘오버’를 하고 있을 때에도 누군가 그네에게 선뜻 거울을 내밀지 않는다. 기울고 치우친 자신의 모양새를 확인시켜 줄 거울이 없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연민이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어도 본인은 좀체 자기를 볼 수 없다. 시쳇말로 사람이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는 법이니.


<11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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