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고통

[신아연의 영혼의 혼밥 757]

by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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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제 글에 많은 분들이 댓글을 보내주시고 공감을 표해주셨습니다. 제 독자들 절반은 저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이니 한창 좋은 나이라고 격려하셨습니다. 103세 김형석 교수님은 돌아보니 60,70대가 가장 좋은 때라고 하셨지요.


아무려면 제가 60이란 나이가 다 죽을 나이라는 생각에 이럴까요. 60이라고 호들갑 떨 일도 아니겠지요. 여전히 밥 먹고 살던대로 살겠지요. 물론 저야 밥벌이 걱정이 늘 따라다니지만 설마 굶기야 할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60전이나 후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늙어간다는 사실 외에는. 축구 후반전도 전반전과 다름없이 골 넣기에 몰두하는 것처럼. 다만 체력이 달리겠지만.


운동을 안 하는 것에 비하면 제 몸은 건강한 편이고, 심신의 나쁜 습관도 없고, 고약한 심뽀를 가졌거나, 본업에 불성실하거나,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이 아닌, 등급을 매긴다면 글쟁이로는 A마이너, 인간으로는 B마이너 급 정도는 됩니다. 이 성적을 가지고 살던대로 살면 살아지겠지요.


어제 오후 그리고 오늘 새벽 두 카톡을 받았습니다. 제 마음을, 제가 겪어온(겪어가는) 세월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호주의 두 분이지요. 제가 60을 아파하는(나이 자체보다 어떤 나이가 계기가 되는) 진정한 이유를 아시는 두 분의 위로가 눈물을 펑펑 솓게 합니다. 지금도 눈 앞이 어룽져 글씨가 잘 안 보이네요.


여러분들은 제가 속을 다 드러내고 산다고 여기시지만 저도 '빤쓰'까지는 못 벗었고 못 벗어요. 그런데 이 두분은 저의 빤쓰 속 사정을 아시는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그 두 사람 앞에서는 홀랑 벗을 수 있느냐 하실 텐데요, 그 두 사람은 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든 일을 겪었거나 현재 저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제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거지요.


그런 차원으로 본다면 저도 타인을 위로할 때가 있지요. 저도 겪은 고통이 있으니까요.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 고통이 가치를 발휘할 때가 바로 이런 때지요.


저의 후반 인생이, 60살 이후가 그나마 의미를 지니려면 제 고통이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60이 버겁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59살까지도 밥 먹고 살았는데 한 살 더했다고 뭐가 문제겠습니까. 59살까지도 글 썼는데 해가 바뀌었다고 갑자기 글이 안 써질 리도 없고요.


그럼 고통을 잘 승화시키면 될 것 아니냐, 주변 사람도 위로하고 글로도 쓰고 그러면 되겠네, 뭐가 문제냐 하시겠지요. 여기에 제 절망이 닿아 있습니다. 더는 제가 못 버티겠는 거지요. 60을 핑계대며 60이란 숫자에 매여 더는 못 버티겠다고 버티는 저의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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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실존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대학 다닐 때 실존철학에 빠져있었고 졸업 논문도 키에르케고르에 대해 썼지요. 썼다기 보다 베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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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만에 썼지만 불후의 고전이 된 <죽음에 이르는 병>, 가족의 죽음을 연달아 경험한 35세 젊은 철학자의 깊은 고뇌와 사색에 스무 살 대학생이었을 때는 동경을 품었으나 나이가 이만큼 들고보니 키에르케고르가 안쓰럽기조차합니다. 하지만 그는 42세에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고통의 본질과 구원을 깨달았다는 점에선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요.


오늘도 어두운 이야기, 송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억지로 꾸미진 맙시다. 맨날 밝은 척, 노상 희망에 들뜬 척 하지 말아요, 우리. 그런 인생은 세상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고통입니다. 슬프면 슬프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절규하는 것이 건강한 사람일 뿐 아니라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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