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장자(20)
오늘은 책 이야기 좀 하자고 했지요. 제가 한창 책을 읽을 때는 1년에 120~150권 정도를 읽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밥 먹듯 읽지요. 노상 읽는다는 뜻입니다. 몇 권을 읽는다는 계산이나 생각조차 없지요.
지난 10년간 독서는 제게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원천이었습니다. 물질적, 정신적 생명 둘 다. 짚신 장수 장자처럼 글을 써서 돈을 벌어 몸을 먹여살려야 했고, 혼자 살아가기 위해 정신을 온전히 보전해야 했으니까요. 굶지 않았고 미치지 않았던 것은 글을 쓴 덕분이었고,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던 동력은 독서였습니다.
하지만 독서의 더 큰 유익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사람이 안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은 태어나지 않았던 시간에 미치지 못한다. 그처럼 지극히 작은 존재가 지극히 큰 경지를 규명하려고 하니 혼란이 일어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장자 말씀이지요. 거대한 우주 공간을 놓고 본다면 우리는 얼마나 하찮고 미미한 존재인가요.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상대로 게임을 해보겠다는 야무진 도전이 곧 지식의 축적 아닌가요?
인간의 불행은 의식에 있는 것 같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대붕이 행복할까요, 참새가 행복할까요. 참새지요. 어째서? 무지하니까. 참새는 자신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거지요. 좁다란 자기 세계가 전부이기 때문에 마냥 즐겁지요.
그럼 대붕은? 대붕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세상과 생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는 좌절로 인해 불행합니다. 인식이 확장되고 의식이 깨어있기에 참새처럼 사는 것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독서하는 사람은 대붕의 의식을 지닌 사람입니다. 자기 세계를 전부로 아는 참새가 아니기에 끝없는 고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치의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 게 더 낫지 않나요? 둘 다 암환자인데 대붕은 그 사실을 알고, 참새는 모릅니다. 그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여기 장자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대 너무 애쓰지 말라는. 한계를 지녔다 할지라도, 인생이 통째로 암에 걸렸다 할지라도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남아있는 생을 편안히 살아가라는. 안시처순(安時處順)하라는.
[출처] [신아연의 영혼의 혼밥 790] 왕따 장자(20) 참새가 모르는 것|작성자 자생한방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