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야, 금간 항아리

[신아연의 영혼의 귀로 4]

by 신아연


평생 물을 지고 나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늘 같은 길을 오가며 물을 날랐다. 어느 날 문득 그는 보았다. 자신이 오간 길의 한쪽 편에만 소박한 들꽃들이 옹기종기 줄을 지어 피어 있는 것을. 다른 편에는 팍팍한 흙먼지만 일고 있는데. 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지고 다닌 물동이 중 하나에 금이 가서 길을 오가는 동안 계속 물이 새어 나와 땅을 적시고, 이곳저곳에서 날아 들어온 꽃씨들을 그 촉촉해진 땅에 앉게 하여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했다는 것을. 또한 그는 보게 되었다. 아무런 손상 없는 매끄러운 물동이 쪽의 길은 푸석하고 메마른 흙덩이 그대로라는 것을.



20230205_082642.jpg


제가 전남편을 만나러 가는 두려운 발걸음에 용기를 북돋워 주시려는 분들의 기도 빚이 큽니다. 기도 빚뿐 아니라 밥 빚도 적잖습니다. '돈 빚'도 지우려는 분들께는 정말이지 마음만 받겠습니다. 설마 여비 마련도 않고 그 먼 길을 가겠습니까.



여비라고 하니, 2년 전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하신 분이, 동행해 줘서 고맙다고 주신 호주 돈 1000달러(약 100만원)를 보태 쓰려고 합니다. 그 돈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 집안 일이라지만 남편과의 관계 회복과 가족 치유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생명을 살리는 후원금'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고인도 좋은 일에 썼다고 하실 것 같아요.



그분이 그러셨지요. 본인의 안락사를 책으로 내서 제가 돈을 좀 벌 수 있었으면 한다고요. 돈을 벌려고 책을 낸 건 아니지만, 고인이 될 분의 부탁(자신의 마지막을 기록으로 남겨 달라는)을 거절할 수 없어 낸 책이 아닌 게 아니라 좀 팔렸습니다. 지금까지의 인세로 호주행 경비를 충당하고, 그밖에 사람 살리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그분의 조력자살을 말리지 못했던 것이 제게는 죄책감의 멍울로 남아 있습니다. 독자라는 인연으로 만났지만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석달, 개인적으로 가까워졌을 때 이른바 '골든 타임'을 놓친 것이 안타깝습니다.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더 많이 대화하면서 마음을 돌이킬 '시간 벌기'를 해 볼 수도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 인거죠.



이제 와서 후회해 본들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때 못했던 노력을 스위스 조력사를 택하려는 또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쏟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더 이상은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다는 각오로.



그분과의 4박5일 동행기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를 읽었다며 자기와도 스위스에 함께 가달라는 메일을 받곤 하니까요. 제 독자 중에도 한 분 계시죠. 지난 1월, 저와 함께 JTBC 조력사 관련 방송 '존엄한 죽음 VS 방조된 자살'에 출연하셨던.





34279553635.20230313185616.jpg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저자신아연출판책과나무발매2022.08.26.




이야기가 옆으로 샜네요.



어제는 한국에서 제가 감옥생활, 크리스천들의 표현으로 하자면 '광야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이 글 머리에 쓴 "평생 물을 지고 나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늘 같은 길을 오가며 물을 날랐다. 어느 날 문득 그는 보았다..."를 제게 말씀해 주신 분을 만났습니다.



돌아보면 이 우화를 붙잡고 지난 10년을 버텨온 것 같습니다. 저는 비록 '금이 간 물동이'지만, 그 틈 사이로 흘러내린 물로 인해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과 소통하고, 맘 아픈 사람들, 삶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자잘한 글꽃을 피우고 있으니까요.



이 이야기를 제게 들려 주신 분은 두란노 아버지학교 김성묵 (전)국제운동본부 본부장이십니다. 영치금 넣듯이 김 장로님은 제게 '영치언(言)'을 주셨던 거지요. 어제 이분이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부인 되시는 두란노 어머니학교 운동본부장 한은경 권사님도 함께요.



호주에서 벌어질 '영적 전쟁'을 앞둔 저를 두 분께서 특별히 격려하시고, 맛난 점심을 사주시고, 깊게 기도해 주셨습니다. 두 분께서 혈육보다 더한 따스함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고난이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고난이 '의미의 옷'을 입고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옷깃을, 옷자락을 스칠 수 있을 때일 것입니다. 그 짐에 공감하고, 그 짐을 나누고, 함께 가자며 다독일 수 있을 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제 인생이 매끈한 물동이가 아닌 것에 오히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