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연의 영혼의 귀로 6]
지난 월요일 제가 ‘환갑잔치’를 했습니다. 생일은 다음 달입니다만, 제가 호주를 가니까 지인들이 미리 해 준 것이지요. 강남이라 그런진 몰라도 월요일인데도 음식점마다 거의 다 차고 3차로 노래방엘 갔는데 거기도 손님이 적잖았습니다.
코로나를 견디고 버텨 온 업주들, 2019년 이래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 속에 제가 있었습니다. 저도 1963년 이래 60년을 살아남아 좋은 사람들 속에서 함께 웃고, 생일 케이크의 크림을 핥으며 꽥꽥 노래를 부르고, 절정으로 만개한 봄밤의 벚꽃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하재열 작가의 '심상'
여운을 안은 채 작은 제 방으로 돌아와 감사했습니다.
천지간 외롭다 보니 삶을 경쟁으로, 시기 질투로 살지 않게 되는 것에 감사하고, 그러다 보니 고맙고 미안한 사람만 있지 부러운 사람, 밉고 싫은 사람, 이해 못할 사람이 없는 것에 감사하고, 내가 가난해서 더 가난한 사람들을 다만 몇 명이라도 돌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이 고달프긴 하지만 글 쓸 곳이 자꾸 생기는 것에 크게 감사하고, 무엇보다 지난날의 잘못을 하나님께 용서받음에 감사했습니다.
하늘로부터의 용서로 인해 마음이 점점 더 넓고 낮아져서 궁극엔 누구나 디딜 수 있는 평평한 땅이 되어가고 싶은 소망에 감사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처럼 살다 죽어도 좋은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나 자신만을 놓고 본다면 죽음 앞에 준비가 된 것 같은데, 호주에 있는 애들 아빠를 만나 매듭을 풀고 죽어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를 못 들은 척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용기를 내야 하지만 애들 아빠가 용기를 내어 저를 만나주기를 기도합니다. 어제 함께한 지인들께서 호주에 왜 가냐고 또 물으시길래 이렇게 답을 합니다.
60년을 살았으니 이제야말로 생은 덤이라는 마음이 듭니다. 45세에 암으로 오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도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돌아보니 그건 가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같습니다. 지금까지 많이 살았으니까요.
생이 덤인 사람은 사랑으로 살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그 안의 속사람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저도 좀 아는 분이 얼마 전 TV에 나와서 “평균 수명은 80세이지만 건강수명은 65세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넓고 얕은 관계보다 좁고 깊은 관계가 바람직합니다.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인 사람보다 만날수록 에너지를 느끼는 사람 관계를 맺는 것이 좋습니다. 임종 시에 곁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세요.” 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임종 시에 곁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 이 말에 꽂혔습니다. 상조회사 사람 말고 죽기 전 제 곁에도 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전에 제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겠지요.
임종의 정황은 예측 불허인지라 실제로 곁에 있을 수는 없다 해도 누군가 죽으면서 ‘아, 신아연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 준다면 제 인생도 꽤 괜찮은 엔딩이 되겠지요.
하재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