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미녀의 맛깔난 예수(20)
지난 시간에 죄를 벗어날 묘방이 '당근' 있다고 호기롭게 말씀드렸지요. 그 전에 죄에 대해 좀 더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호주 당근
제 글을 읽은 교우 한 분이 이러는 거예요. 이마에 센서를 달아 놓고 죄를 지을 때마다 불이 들어오게 한다면 사람들마다 쉴 새 없이 번쩍거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기독교는 노상 죄타령이라 지겹고 신물난다지만,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죄를 짓는 것이 우리입니다. 센서에 불 안 들어오게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말이죠.
물론 우리는 엄청난 죄를 짓지는 않았지요. 법에 걸릴 범죄는 하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법에 걸리는 죄와 하나님께 걸리는 죄는 그 범주가 다릅니다. 법에 걸리는 죄는 나라마다 다를 수 있고 처벌에도 차이가 나지만, 하나님 앞에 한 범법의 결과는 인류 공히 최소 '사망'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
야고보서 1장 15절
차라리 법에 걸린 죄를 지으면 죄값을 치르고 다리 뻗고 살지요. 하지만 하나님 앞에 범한 죄는 스스로는 죄값을 치르질 못한 채 죄책감, 두려움, 수치심, 공허함, 상실감, 우울감 등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게 된다는 건데요, 마음에 진정한 기쁨과 평안이 없다는 건데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지난 시간에 죄란 과녁을 벗어난 거라 했지요. 어떤 기준에서 어긋난 거라 했지요. 어떤 기준? 하나님 기준! 진리의 기준!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불안해지고 불만해지고, 불평해지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뭔가를 해야겠지요. 불안, 불만, 불평을 벗어날 수 있는 뭔가를. 왜요?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뭘하죠? 과녁을 스스로 만들어 세우죠. 하나님이 아닌 사람 중심의 과녁을 따로 만들죠.
과녁의 중심에 하나님이, 진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제는 내가 있게 되는 거지요. 나 중심 과녁에다, 내 기준에다 죽을 똥 살 똥 활을 쏩니다. 그 결과가 문명이고, 문화고, 개발이고, 발전인 거지요.
그럼 짐승처럼 먹고 자고 싸기만 하는 게 죄 없이 사는 거냐고 하실 분도 계실 텐데요, 하나님 과녁에 있어도 그런 건 다 됩니다. 아니, 더 잘 됩니다. 온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분이니까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데 하나님 대신에, 진리와 순리 대신에 우리 힘으로 그걸 이루려니까 욕심이 동력이 됩니다. 욕심으로 뭔가를 이루려는 것, 사람 힘으로 뭔가를 하려는 것, 그것이 죄인 거지요.
주변에서 이따금 "나는 열심히 산 죄밖에 없다."는 한탄을 듣곤 하는데 바로 그 열심히 산 게 죄입니다. 그 동기가 '나의 열심'이었기 때문이지요. 나 스스로 온전해지고자 한, 나의 욕심이었기 때문이지요.
저도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게으르지 않았고, 에너지도 넘치고, 끈질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보시다시피 요 모양, 요 꼴입니다. 왜? 내 판단대로, 나 옳은대로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지요. 엉뚱한 과녁에 들입다 화살을 쏘아댄 거지요.
그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는 건데요, 욕심으로 죄를 낳았고 그 죄가 막 자라서 스트레스, 악성 변비, 걱정근심, 좌절감, 우울증, 불면증, 암이 되어 찾아옵니다. 내가 키운 장성한 자식들이죠. 독자 중에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암투병 중인 분도 계시는데 송구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