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미녀의 맛깔난 예수(28)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가도.
그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사랑 때문에 어긋나고 파괴되고 상처를 주고받고, 또한 사랑 때문에 치유되고 회복되며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죠.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이 곧 영원한 사랑의 증거인 거지요.
그리고 그 사랑은 생명과, 나아가 영생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을 전하고자 제가 감히 제 남은 생을 걸었다고 하면 여러분은 웃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제가 살 길이라고 한다면, 속죄의 길이라고 한다면 웃지만은 않으시겠지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인 죄값을 치르려고(물론 예수님이 이미 대신 치르셨지만)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건 것처럼, 저는 제 두 아들을 죽인(영적으로) 죄값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살리는 일로 치러야 합니다.
제게는 바울이 멘토입니다. 저하고 닮은 것 같아요. 잘못된 길인 줄도 모르고 제 열정에 겨워 마구 달려가던 일, 그러다 죽음 직전으로 와장창 깨지던 일, 자신의 추함을 정직하게 돌아 본 후 예전 그 완고했던 에너지를 이번에는 삶과 글로 복음 전하는 것에 돌린 일 등.
물론 본인의 결단이나 의지가 아닌, 예수님의 은혜로 바울이 새 삶을 살 수 있었던 거지만요. 제가 바울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 것조차 예수님의 전적인 은혜이듯이요.
사람들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합니다. 제 두 아들이 방황하고 상처받고 고생하는 건 남편의 폭력 탓이라고. 남편은 아이들을 때리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저를 때렸지요. 그것 때문이라고. 그러니 남편 탓이라고. 남편은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그게 맞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반문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홀가분해질 수 있냐고? 면죄부를 받고 내 죄가 아니라고 해서 내 아이들이 받은 상처가 없어지냐고? 그 소용돌이에서 희생당한 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자식들 아니냐고?
큰 아들 진원
작은 아들 규원
사람들이 잘못된 것에 예수님은 아무 책임도, 잘못도 없지만 너무 가슴이 아파 그 죄를 지고 대신 돌아가셨잖아요. 자식이 아플 때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아파주고 싶은 부모마음처럼. 우리는 마음뿐이지만 예수님은 진짜로 대신 아프실 수 있는 분이죠. 심지어 대신 죽으실 수 있는 분이죠. 그리고 죽으셨죠.
그 사랑을 생각할 때 저는 눈물이 납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만 들어도 오열합니다. 그 사랑에, 그 용서에 감격하여 상처받은 제 자식들을 어떻게든 회복시켜야 하고, 그 방법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서툽니다. 제게 사랑은 너무나 익히기 힘든 외국어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 능숙한 모국어지만 저는 참 사랑이 어렵습니다.
© wesleyphotography, 출처 Unsplash
제 아이들을 생각할 때 저는 아직도 정죄감에 시달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다 해결해 주신 문제인데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바울도 이따금 그랬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로마서 8장 1절을 썼겠지요.
저는 이번에 호주에서 붕어빵 둘째 아들 규원으로부터 로마서 8장을 선물 받았습니다. 저에 대한 사랑을 성경으로 대신 전한 거지요. 멋진 녀석입니다. 간지 있지요?^^
붕어빵은 제게 말합니다.
엄마 잘못이 아니라고,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고, 다만 나는 인생에서 내가 겪어야 할 일을 겪는 것뿐이라고. 내 선택이자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이라고...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장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