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글있다 4
그렇게 첫 직장에서 내가 '이빨을 까는 데'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매주 포토 에세이를 쓰면서 이빨이 날로 달로 연마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20대 중반에 이미 단단한 이빨로 무장한 업계의 무서운 아지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ㅎㅎ
그리고는 몇 년 후 호주로 갔고, 작은 신문사나마 글 쓰는 일을 해 봤다는 것이 경력이 되어 바로 호주동아일보에 다니게 되었다. 아, 놀래라~~ 나는 또 기자가 되었던 것이다. 기자의 망령이 태평양을 건너까지 따라와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는...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호주동아일보를 다니는 동안 어떤 의미에서 나는 또 유능한 기자였다. 호주동아일보에서 '신아연이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 코너를 연재하며 나하고 인터뷰를 하고 싶어한 사람들이 줄을 섰다는(뻥을 좀 쳐서) 점에서.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 인터뷰가 책이 되어 나왔으니 증거는 있다. 흠흠.
그때 면접을 겸한 입사 시험이랄까, 간단한 테스트를 했는데, 편집부에서 오페라 하우스를 찍은 사진을 내 앞에 내놓는 것이었다. 물론 사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간단한 글이 있었는데 그것을 번역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 번역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내 이빨 실력을 제대로 보여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해 오던 대로 번역문 밑에 약간의 내 감상을 첨가했고 그것이 좋은 인상을 주었지 않았나 싶다. 밑도 끝도 없이 사진 한 장, 그림 한 장만 놓고도 자유자재로 '썰을 풀 수'있었던 내가 텍스트까지 주어지니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는 격이라 할까.
그렇게 시드니에 있는 동포 신문사에서 일을 하다가 남편이 느닷없이 호주 퀸즈랜드 주 북부 광산도시 타운스빌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내가 말한 내 글을 쓰게 된 두 번째 계기가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미리 말하자면 타운스빌 생활 10년 동안 나는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자식으로 산다는 것> 등 세 권의 책을 내게 되었으니, 나 개인의 생활로 보자면 보람있게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이라는 배는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배가 가라앉는 사태 혹은 분해되는 상황에 처해 네 식구가 각기 구명 조끼만 하나 씩 걸친 채 망망대해로 흩어져 버린 형국에 처했으니...
돌이켜 보면 남편의 타운스빌 행은 최악의 수를 둔 선택이었다. 모험을 즐기는 것도,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엇 때문에 그 오지를 가서 가족의 해체를 맞게 되었는지... 당시 시드니는 올림픽을 전후하여 바야흐로 집값 폭등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하룻 밤 자고 났더니 집값이 2배, 5배까지 뛰어올라 집 가진 사람들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집을 두 개 이상 가진 사람들은 평생 먹고도 남을 돈을 하루 아침에 모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때 집을 살 밑자락 돈이 있었다. 그런데도 돈이 똥인 줄 알고, 돈벼락(똥벼락)을 맞을까 무서워 돈을 피해 부랴부랴 시드니를 떠났으니.
모든 것이 부질없고 지금와서 후회해 봐야 다 소용없는 일이지만. 후회란 엄격한 의미에서 무의미하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선택이든 당시에는 최선이라고 했을 터이니. 후회할 줄 뻔히 알면서 어떤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게 아니냔 말이다. 지금 다시 선택하라면 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거지 그때는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선택했을 것이니. 다만 그 선택이 어리석었다면 그만큼 지혜롭지 못했다는 뜻이니 지혜롭지 못한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면 그러한 선택을 다시 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다. 그래서 후회란 말은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공허한 말이라는 것이다. 설명 참 어렵게 하고 있다, 시방 내가. ㅜㅜ
부처님도 제 1의 화살은 맞을 지언정, 제 2, 제 3의 화살은 맞지말라고 하시지 않았나. 물론 우리는 제 1의 화살 뿐 아니라 제 2, 제 3의 화살을 지속해서 맞을뿐더러 심지어 계속해서 화살을 맞고 있다는 상황조차도 인식 못할 때가 많지만.
그건 그렇고,
다시 글 이야기로 돌아와서.
남편은 타운스빌에 현지 법인을 둔 고려아연에서 일했다. 지금 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그때 함께 근무했던 분들의 아내들이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고 오래 된 이야기이니 그냥 해 보기로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