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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인간은 원체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

내 안에 글 있다 5

by 신아연

남편은 호주 북부 도시 타운스빌에 있는 고려아연의 호주 현지 법인인 '선 메탈' 사에서 10년을 근무했다.

오지라고 하니 정글이라도 연상하실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오지'라함은 한국인의 자취가 전무한 곳으로, 아니 동양인 자체가 거의 없었던 곳이라 우리가 지나가면 호주사람들이 구경하는 정도, 한국 식품점이나 한국 교회, 한국 식당 등은 물론 아예 없던 수준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오지인 것이다. 쉽게 말해 한국인 등 동양인이 살지 않는(호주인과의 결혼 등으로 오래 전에 토착인이 된 경우 외엔) 순수 호주인의 도시였던 것이다.


시드니에서 타운스빌로 올라온 직후의 그때 내 느낌은 다리와 더듬이가 제거된 풍뎅이류의 큰 벌레 같았다. 아니, 그 전에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가 된 자신을 보는 느낌이 앞섰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그 벌레가 다시 몸뚱이만 남고 사지가 다 잘려버린 지경이랄까...


나 개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동포 신문사 기자 생활을 즐겁게 하지는 않았지만(계속 말하지만 나는 기자질이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 늘 하던 일을 갑자기 그만 두게 된 것은 마치 내 앞에 차려진 밥상을 홀딱 빼앗긴 것처럼 황당했다.


대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듣보잡 생활'이 끝없이 펼쳐졌다. 아침에 남편과 아이들을 직장과 학교에 보내고 난 후 집안 일을 마치고 나면 대략 11~11시 30분 정도. 그때부터 선메탈에 근무하는 주재원 부인들이 한 집에 모여들었다. 오늘은 누구네 집, 내일은 누구네 집 하는 식으로 돌아가며 점심을 내게 되는데, 몸이 아프거나 집에 무슨 공사가 있어서 인부를 기다려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모임에 빠진다는 건 암묵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고립되고 폐쇄적이면서도 공개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하는 따위의 둘러대기는 아예 통할 수가 없었다. 그 손님이란 게 한국에서 온 가족들이 아닌 다음에야 오가는 사람이라곤 우리들끼리가 결국 손님이었으니.


자녀들의 연령에 따라 대략 두 그룹으로 나눠지게 되는데, 취학 전과 초등학생 어린 자녀를 둔 젊은 엄마들과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중년의 엄마들로 모임이 나뉘어져 주구장천 함께 모여 점심을 해 먹고 3시 경 아이들을 픽업할 시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도 거의 모두 같은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우리는 한 집에서 나와서 줄줄이 카 퍼레이드를 하듯이 학교로 차를 몰았다. 아이들을 차에 태워 하교 시킨 후엔 영어 등 과외 수업을 받는 곳으로 데려다 주거나, 아니면 집에 가정교사를 부르고, 피아노 등 음악 레슨을 받게 한 후, 저녁밥을 준비하고 남편들이 퇴근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다.


더구나 고려아연 주재원 부인들은 호주에 오기 전부터 회사에 입사한 이래 사택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시쳇말로 누구네 밥 숟가락이 몇 개라는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한국에서 호주로 사택을 옮겨왔을 뿐, 자기들끼리의 밀착된 생활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중에 시민권을 가진 호주 교포로서 현지 고용된 우리 가족만 물에 기름처럼 겉돌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라는 기름과 저들이라는 물을 섞이게 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렇게 열심히 섞어 놓으면 잠시는 엉겨 있는 듯 하다가도 이내 기름과 물은 분리되었다. 애초 함께 물이거나 같은 기름이었으면 할 필요도 없는 수고와 노력임에도...


이렇게 남편과 아이들을 건사하며 엄마들은 거의 매일 서 너 시간을 함께 모여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으며 수다를 떨고 놀면서 떡판에 찍어낸 듯, 같은 생활, 같은 시간을 보냈다. 나의 내부 균열과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져 갔다. 그때 나는 30대 중반 정도였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런 생활은 내겐 말도 안 되는 낭비였다. 어제 글 말미에서 내 글을 읽는 당시 주재원 부인들에게는 매우 미안하고 송구하고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제서야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나로서는 다행이다. 그 분들은 놀랄 것이다. 아니, 진원이 엄마가 우리 중에 밥도 제일 많이 먹고, 우스개 소리도 제일 잘하고, 우리를 제일 재미있게 해 줬으면서 속으로는 그런 '음흉하고 반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어쩌면 배신감마저 느낄지 모르겠다.


그 분들의 생활을 탓하자는 건 당연히 아니다. 다만 나는 그랬다는 것이다. 내가 그 분들보다 더 열심히 살았던 것도 물론 아니다. 아이들을 더 잘 키운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나라는 인간이 원체 그렇게 생겨 먹어서 그럴 뿐이다. 나는 늘 초조했다. 이건 아닌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되는데 하는 내부의 소란으로 나 자신을 들볶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먹고 노는 것에 시간을 흘려 보낸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무기력과 초조함, 불안이 내면에 똬리를 틀기 시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아우성을 더는 누를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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