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남 3녀 우리 엄마 아빠의 자녀 중 유일하게 결혼 한 이는 차녀인 나다. 아픈 시어머님과 아직 손이 가는 어린아이가 있었기에 비밀로 했지만 친정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은 쉬쉬한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님의 생이 다해갈 무렵, 친정 엄마는 사시던 곳 대학병원에서 폐암 의증 판정을 받았다. 고통은, 슬픔은, 절망은 데칼코마니와도 같은 모습일까. 아직 엄마의 투병기는 겪지도 않았는데 이미 나는 많은 것을 겪은 느낌이었다.
‘양쪽 전이, 수술 불가, 거대 종괴’ 의무기록지에 기재되어 있던 상태명들은 무시무시했다. 연타로 이어진 불행의 어퍼컷에 소파에 널브러져 울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네이버의 가입자가 가장 많은 폐암 환우들의 카페에 가입했다. 어머님 때도 그런 적이 있어 그것은 내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가입인사를 남기고 글을 쓸 수 있고 원하는 글을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충족시킨 뒤 카페 활동을 시작했다. 어머님의 간병기에서 선두에 있던 이는 남편이었지만 엄마의 간병기에서 선두에 서야 할 사람은 차녀인 나였다.
폐암은 어떤가.
폐는 복잡하고 섬세한 기관이다. 간처럼 초음파상으로 암을 거의 추정할 수도 없고 정확한 결과를 위해 복잡한 과정을 거쳐 기흉 등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기관지 내시경을 넣어 조직을 떼내어 검사한다고 해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엄마는 대장내시경검사를 받기 위해 엑스레이를 찍었다가 폐에서 이상을 발견했다. 기침을 한다거나 가슴이 답답하다거나 하는 기본적인 건강에 우려가 되는 징표들은 늘 있던 것이었으나 그것이 암의 증상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병원쇼핑.
동생은 나의 행태를 이렇게 불렀는데 나는 서울의 네임드 병원 세 곳과 경기도 대학병원 한 곳의 진료를 보러 돌아다녔다. 한 곳은 엄마를 동반하지 않은 대리진료였는데 의사는 면전에서 싫은 소리를 했다.
‘이러니 어머니의 정확한 병명이 오리무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다니시던 지방의 대학병원에서 제2차 조직검사를 했더라면, 그것을 해서도 어떤 병변도 나오지 않고 애초 로컬에서 먹었던 염증의 약이 워킹을 해 시간이 지나 줄어든 것이 확인되었더라면 우리는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조급증이 일을 키운 것일지도.
어쨌든 지나고 나면 보이는 것들은 역시 그때는 때가 아니었기에 알 수가 없다.
대학병원 두 곳은 조직검사를 하자고 했다. 기존 지방 병원에서 찍었던 CT를 바탕으로 한 진료였다. 한 병원은 엄마의 폐 CT 사진을 보더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며 엑스레이를 찍어보기를 원했다. 그리고 기존에 먹었던 폐렴 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암이 아니라는 것을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일단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루아침에 반전이 되는 일이었지만 의사의 말을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카페에서 본 그 의사의 평판 때문이었다. 오진율이 높다는. 결국 나는 다른 병원에 방문해 새로 CT를 찍었고 그 의사까지 폐렴 소견을 보였을 때에야 그 말을 신뢰할 수 있었다. 온라인 카페는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지만, 그것이 백 퍼센트 사실은 아니기에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리고 카페에 가입해 글을 쓸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이미 질병에 깊은 관여도와 염려가 있기에 올려 있는 모든 정보들이 조금 심각하게 권유될 수 있다.
이를테면 폐에 있는 작은 결절들 또한 쉽게 넘어가지 않고 검사를 권유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될 수 있다는 뜻이다.
카페에는 오늘내일 곧 영면에 들어갈 이들의 사연이 즐비했다. 글들은 표정도 없고 소리도 없지만 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는 마음에 몇 시간을 들여 사연들을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어고 이에 걱정과 근심은 증폭되어만 갔다.
엄마의 보호자로 대기실에 있을 때가 떠오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미 장성한 아들은 탈모가 있는지 머리숱이 중간중간 비어 보였고, 아들과 닮은 중년의 남자는 숱이 풍성했지만 가발을 쓴 듯했다. 남자만큼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와 함께 남자는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대기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는 재킷을 입었고 목에는 스카프를 둘렀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며,
"쓰읍 5개월. 앞으로 5개월" 이라고 되뇌었다.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자 또한 수심이 깊은 표정이었다. ㄷ자 구조의 대기실에서 사람들이 모두 남자와 그 일족을 바라보았다. 나는 의사에게 선고받은 여명을 말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생에 단 한 번이라도 입에 담지 않을 수도 있는 말들이기도 했다. 백의 가운을 입었으나 그 시간 의사 선생님은 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엄마는 그 뒤 몇 개월의 항생제를 지니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큰언니와 함께.
폐렴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을 받고 병원에 다녀와서 엄마는 당신이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죽음 앞에 선 당사자의 마음을 헤아릴 새도 없이 나는 보호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려 하였기에 이제야 들어 볼 수 있는 본인의 진심이었다.
이 과정이 근 한 달 보름에 걸쳐 일어난 일들이었다.
어머님께 기도를 올리며 친정엄마의 건강을 소망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님이 도와주시라고. 이런 이타적이면서도 이기적인 기도문을 형님이나 아가씨에게도 말했다. 내가 그렇게 기도를 올렸다고. 조용히 ‘그래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님을 닮고 어머님을 닮은 자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항생제를 복용한 지 3개월여. 고향에 계신 엄마가 정기검진 때 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남편과 나는 srt를 타고 세 시간 거리의 엄마를 모시러 갔다. 해마다 이런저런 일로 엄마가 올라오셔 우리들 곁에 오래 있다 가셨기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빠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한번 안아본 아빠는 바싹 마르셨고, 친근한 담배 냄새가 났다. 아빠는 근간 건강검진을 받으셨고, 평생 흡연을 하셨지만 다행스럽게도 작은 결절이 있을 뿐 폐에 큰 이상은 없었다. 부모님의 척박한 삶을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었다. 사위를 어려워하는 엄마는 올라가자는 사위의 권유에 별 거부감도 없이 기차에 오르셨고 CT를 찍고, 진료도 받으셨다.
결과는 폐렴 완치.
더 이상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건강함이 모두가 바라는 일상이라면 질병은 비일상적인 일일 것이다. 대기실을 지나오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많은 비일상에 처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상을 다시 획득한 자들의 얼굴은 어떻게 비쳤을까. 지난 몇 개월간 가슴을 졸였던 시간들을 생각해 보면 이런 잠시의 기쁨쯤은 누려도 되지 않을까.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좋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언가 찜찜한 기분으로 병원비를 내지도 않고 집으로 왔고,
우리가 그랬다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