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장례식은 평이했다. 코로나로 문상객들이 많지는 않았으나 1남 2녀의 장성한 자녀들이 있기에 빈소를 찾는 발길들은 꾸준히 이어졌다. 아이의 큰고모는 25여 년 전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서 당시 봉쇄령이 내린 뉴질랜드에서 입국하지 못했다. 교회 목사님의 예배에 남편은 온라인 줌을 연결해 큰 고모 내외가 참석토록 하였고, 입관식이라든가 화장 당시 영상을 찍어 가족밴드에 실시간 올림으로써 상황을 공유했다. 어머님의 큰딸인 아이의 고모는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신 날부터 거실 소파에서 쪽잠을 청하며 기도하고 언제나 전화 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다. 몸이 이곳에 있어 현실적인 일을 처리하느라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는 것이 오히려 낫겠구나는 생각은 괴로움과 자책감으로 울부짖는 고모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과 어머니를 보내드린 날에는 눈이 내렸다. 눈이 소박하고 이쁘게 날려 퍽 근사했다. 아가씨는 그 고운 눈송이들이 어머님의 선물이라도 된다는 듯 그 장면을 핸드폰 영상에 담았다. 아가씨가 오래전 블로그에 남겼던 글이 생각난다. 20여 년 전 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기일을 회상하는 글이었다. 4월, 봄은 성큼 와 있었고 아가씨는 노란 프리지어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고 했다. 아버님이 눈을 감으신 것을 모른 채. 하얀 눈송이와 노란 프리지어. 이 두 오브제는 부모님을 추억할 아가씨의 의미소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의미 있는 날에는 모든 일상적인 것들마저 다 의미가 되겠지만 나 또한 추웠던 그날 장례식장 밖으로 내리던 하얀 눈과 상중에 입었던 검은 우리들의 옷차림, 그리고 서늘하고 차가운 바람을 꼭 지금 순간인 것처럼 기억한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 남매의 어머니는 잠을 자다 죽는다. 삼 남매가 모두 결혼 전이었고 기계처럼 하루 종일 일만 하다가 갔으니 남매들은 평생을 엄마를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여생을 보내게 될 거였다. 남매는 엄마의 유골함을 집에 모신다. 유골함을 집에 모시다니. 그럴 수도 있구나. 그것은 불법이 아니구나. 나는 그제야 알았다.
유골함이 집에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드라마의 그들이 유골함에 대고 조석으로 낭만적인 인사를 건넨다거나 속엣말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삼 남매는 어머니가 떠나간 후 그리움을 삼킨다. 어머니가 죽던 날 익다 못해 까맣게 타버린 압력솥의 밥들을 긁어내며,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셔츠를 빨아내며, 어머니 손때가 묻은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눈물을 쏟고 그리움을 삼킨다.
어머님에 대해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는 게 있다면 이런 거다.
결혼 전 일의 특성상 새벽에 들어오는 남편을 위해 간식을 준비하며 남겼던 포스트잇 들. 내용은 거의 같다. 당시 제철인 과일들을 냉장고에 넣어두었으니 먹으라는 것과 사랑한다, 미안하다, 수고가 많다. 그리고 간간히 가장 역할을 하는 아들이 챙겨야 하는 공과금과 약속 같은 것. 그런 어머님의 메모는 책 한 권으로 남아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가족을 위해 드리는 기도, 나지막이 부르시던 찬송가의 허밍.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면 늘 하시던 말씀 ‘이제 이병철(삼성 창업주)이가 눈 알로(아래로_어머님은 경상도 태생이시다.) 보인다’ 비 오는 날 부추전을 부쳐 가져다 드리면 ‘마침 먹고 싶었던 것을 새아기 네가 어떻게 알았니’, 음식의 간이 싱겁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면, ‘우리 목사님이 그랬어. 짜면 물을 더 넣고 먹고, 너무 싱거우면 소금을 넣어 먹으면 된다고. 아가 괜찮다.’와 같은 고정 멘트들. 그런 멘트들은 상황과 음식들이 매개가 되어 기억을 환기시킨다. 나는 어머님과 십 삼 년을 함께 살았다. 남편은 어머님과 한 번도 떨어져 살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남편의 어머님에 대한 빈자리는 더욱 크리라. 그리고 뒷모습. 거리에서 뒷모습들로 어머님을 추억한다. 어머님과 비슷한 몸피의, 비슷한 자세의, 비슷한 옷차림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뒷모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