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지 한 달이 되어갈 무렵 병원에서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어머님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큰 병원으로 옮겨 진료를 받아 보라는 이야기였다. 남편은 처음 요양병원에 어머님을 입원시킬 당시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를 보며 의사와 상담했다. 그때 의사는 어머님의 여명을 길면 6개월 예상한다고 했다. 어떤 보폭 같은 것. 보통 이 정도의 스펙을 가지고 있는 환자는 어느 정도의 보폭으로 종착점에 도달하는 가에 대한 통상의 견해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의사의 그 소견은 틀렸다.
어쨌든 그 말을 듣고 남편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거동조차 불가한 지금 상태의 어머님을 인근 대학병원이 아닌, 어떻게 하면 치료받는 서울 소재의 병원으로 모실 것인가에 대해. 간치료로 시작된 합볍증이므로 연계 치료가 용이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틀 쯤 지났을 어느 날 오전. 출근 전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있던 남편에게 요양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님이 위급하니 구급차를 대절해서라도 병원으로 모시라는 담당의사의 전화였다. 남편은 당황했는데 처음 전화 통화 시보다 위중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요양병원에서 소개받은 응급 앰뷸런스를 불러 어머님을 태우고 치료받던 삼성 병원으로 향했다. 국민들의 70퍼센트 이상이 백신치료를 받고 코로나로 인한 감염 후 위중증으로의 전환도가 많이 낮아진 지금은 코로나19에 대한 정부규제가 많이 완화된 상황이지만, 당시에는 병원 자체 규칙도 매우 엄격하여 여러 제한 사항이 있었다. 보호자도 1인 한정으로 진료실이나 입원실에 입실이 가능하였고, 기침, 발열환자의 경우에는 pcr검사 후 음성 판정이 있어야만 진료가 가능했다. 요양병원에 입원했을 당시에도 어머님은 보호자 출입도 안되는 낯선 곳에서 한 달 동안 힘들어하셨다. 이 날 앰뷸런스를 타고 갔지만 어머님의 발열, 기침 등 호흡기관련 질환으로 병원입실이 불가했다. 어머님은 코로나 검사를 받으며 앰뷸런스 내에서 대기하셨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 4시간 동안 앰뷸런스 내에서 남편과 아가씨와 대기 후 병원에 들어가서도 2차 코로나 정밀 검사 결과를 위해 밀폐된 공간에서 진료를 받기 전까지 근 1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의사는 검사 결과는 누가 봐도 코로나에 걸린 폐질환자의 폐인데 코로나는 아니라고 판정했다. 그만큼 폐기능이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어머님의 병명은 급성 폐렴이었다. 어느 정도 면역체계가 있는 상태의 사람이라면 걸리지 않을 폐렴이었는데, 체력이 거의 고갈된 어머님은 폐렴균에 노출되어 폐렴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그 길로 배낭을 챙겨 간병에 나섰다. 어머님은 고농도 산호 호흡기를 다셨고, 한껏 높인 산소포화도를 줄일 수 없었고, 진통제를 맞으셨고, 다량의 진통제 투여 후 의식을 점차 잃어 가셨고, 영면할 당시에는 거의 의식이 없으셨다.
어머님을 간병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날 때 꾸리던 남편의 가방을 기억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큰 사이즈의 가방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내가 당근 마켓에서 테스트삼아 단돈 만원에 구입했던 가방이다. 가방은 대략 20l의 크기로 여러 가지 포켓이 달려 실용성이 강조된 디자인이었다. 국내 중소기업 브랜드 가방이었다. 막상 사고 보니 아이 몸피에는 너무 큰 듯 하여 다락방에 놓아 두었는데 그 가방이 남편 보기에는 쓸모있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평소 물건을 구획하하여 소지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기에. 간암 시술을 위해 며칠 어머님과 함께 입원해 본 경험이 있어 남편은 이번에도 착착 물건을 꾸렸다. 병원과 우리 집의 거리는 꽤 되어 피곤한 몸으로 왕복하기에는 힘들었고 어머님의 상태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그 가방은 처음 그것을 사기 위한 목적으로는 단 한 번도 소용되지 않았고 오직 간병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열흘 간의 간병, 장례식장에서도 남편은 그 가방을 들고 다녔다.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고 난 뒤 남편은 가방의 주머니를 정리해가며 구석 구석 쓸모가 있는 물건이었다고 말했다. 애초 그 가방의 쓸모가 어떻게 될지 샀던 나는 몰랐던 것이다.
어머님은 세 번 정도 고비를 넘기셨다. 의사의 ‘오늘 밤, 오늘 밤’ 예측은 세 번 빗겨 간 뒤 들어맞았다. 고통의 순간이 너무 참혹해 남편은 어머님이 더 이상 고통 없는 곳에 임하기를 염원하는 글을 가족 밴드에 세 차례 올리기도 했다. 임종 말미 남편은 아가씨와 함께 번갈아가며 어머님을 간병했다. 의사의 두 번째 ‘오늘 밤’ 때에 나와 아이는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는 병실 내 입실이 안되어 먼 발치에 서서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머님은 손으로 인사하시며 어서 가라고 하셨던가.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지만 어머님은 내 손이 뜨겁다고 하셨다. 건강한 신체 조건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유지하고 있을 36도 가량의 체온은, 중증 환자인 어머님껜 너무 뜨거운 거였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와 24시간 간병에 여념없는 남편 앞에서 감상을 부리는 것은 사치였다. 어머님은 물을 드시면 안 되나 물이 너무도 마시고 싶은 환자였다. 남편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어머님은 내게 빨대 컵을 달라고 하셨고, 입술만 축인다고 하셨지만 남편이 돌아보았을 땐 이미 한 모금을 넘기신 뒤였다. 누워있는 상태에서의 물 한모금은 폐로 들어갈 확률이 높았고, 이런 실랑이는 벌써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남편이 언질해주었지만 그때까지 나는 ‘깨닫지’를 못했던 것이다. 어머님의 갈증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큰지를. 어쨌든 나는 남편에게 지청구를 들었고 지청구를 듣는 나를 보고 어머님은 남편에게 눈을 흘기셨다. 평시에는 있을 수 있는 모자간의 가벼운 언쟁이었지만 불과 몇 분 전 눈시울을 붉히고 있던 나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어머님께 나는 죄송하다고 했다. 더 잘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어머니는 아니라고 하셨고 그런 소리 말라고도 하셨다.
남편은 어머님께 임종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물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남편은 자신이 계속 천국소망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했음으로 어머님이 임종에 대한 생각을 하셨을 거라고 했지만 어머님 스스로 ‘이제 나는 하늘 나라에 간다’거나, ‘아버님을 만나러 간다’거나 하셨다는 말씀은 듣지 못했다. 고통 속에서 어머님은 당신의 마지막 나날들을 온전한 정신으로 보내지는 못하셨으리라. 그 주 주일이 되어 어머님은 아들이 틀어 놓은, 당신이 다니던 40년 교회의 예배를 마지막으로 귀로 들으시고, 한 주가 시작되는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 오전 9시 쯤에 영면하셨다. 평생을 단정하게 살아 온 양반에게 어울리는 시간을 선택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