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브래드피트 주연의 영화를 보면, 벤자민은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로 죽는다. 이 영화의 원작은 핏츠 제럴드의 것인데,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노인으로 태어나 아기로 죽는 설정만 가져오고 소설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오히려 영화와 가깝다.
노인의 몸으로 태어난 벤자민 버튼은, 친아버지로부터 고아원이 아닌, 요양병원에 버려진다. 이 영화의 원작인 소설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이 소설의 원제는 '벤자민 버튼의 기묘한(기이한) 사건'- 벤자민에게만 일어난 이 역행이 벤자민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어린 생명체들의 생존 전략 중에는 '작고, 귀여울 것'이라는 게 있다. 갓 태어난 생명체들은 작고 귀엽다. 이 외양이 돌보는 이들로부터 약한 생명체에 대한 배려, 생명의 경이로움을 불러 일으켜 기꺼한 수고를 감내하게 한다.
이 영화를 본 뒤 사람이 노화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벤자민처럼 죽을 수만 있다면 은총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벤자민은 늙어지며 어려지는 것 때문에 삶에 정착하지 못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겪는다면, 사회의 시스템은 이에 맞춰 변할 것이고 벤자민 케이스에 대한 편견은 사라질 것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 허리가 휘어가고 머리가 세어가며 귀가 들리지 않는 몸을 지켜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가족에게는 슬픈 일이며 몰이해, 몰상식한 특정 부류들에게 이것은 혐오스러운 일로 비춰지기도 한다.
특히 나와 남편의 부모님은 소위 먹고사니즘에 바빠서 자신들을 가꾸지 못했다. 당신들이 자라난 삶은 척박했고, 무엇이든 손으로 일구지 않으면 눈 앞에 떨어지는 것은 단 일푼도 없었기에 근검과 절약을 방패처럼 두루고 성실함과 억척스러움은 그들의 경전이었다. 자녀들은 그만큼 잘 자라게 했을지 몰라도 당신들의 몸은 그러므로 그렇지 못했다. 그런 과정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그래서 연로한 부모님께 연민하고 돌봄의 책임과 의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머님의 늙고 병든 몸을 보듬은 것은 아들인 남편과 딸인 아가씨였다. 어머님은 약해진 체력 탓에 몸에 들어온 치료술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종괴는 처음의 절반크기로 줄어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어머님의 생기도 가져가 버렸다. 잘 못드셨고, 잘 걷지 못하셨으며, 잘 일어나 있지 못하셨다.
응급실에 다녀온 뒤 2주간의 우리집에서의 가료생활은 마치고 어머님은 아가씨네로 가셨다. 수족처럼 어머님과 함께 할 딸에게로. 응급실에서의 영양 수액, 일주일에 한번씩 간호사가 가정에 방문해 수액을 놓아주며 어머님은 잠시 잠깐 기력을 회복하셨지만, 전반적으로 어머님의 건강세는 일몰이었다.
기저귀를 찼음에도 변뇨가 흘러 나와 아가씨는 하루에도 몇차례 이불 빨래를 해야했고, 몇숟가락 드시지 못하심에도 하루 세 끼 식사를 차려야했다. 항상 누워 있고만 싶어하시고, 드시지 않으려고 하면 어르고 달래 다만 몇 숟가락이라도 드시게 해야 했다.
3주를 그렇게 보냈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어머님은 요양병원으로 가시게 되었다. 그런 결정을 한 것은 오빠였던 남편이었다. 수족과 같은 돌봄을 받으면 어머님이 일어나실 것이라 여겼지만, 일상회복에 대한 갈망이 쇠약한 육신에 대한 기약없는 온정의 손길을 뿌리치게 한 것이다. 냉혹하게는 그렇게 표현될지라도 사실 어머님의 건강은 말라가는 샘과도 같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어머님의 여명은 기울어가고 있었고, 그런 과정 중에 우리와 아가씨의 손을 거쳐 간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