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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ho Feb 20. 2024

내가 불행 포르노의 의미망에 걸려들지 않는 법

유튜브에서 어느 다큐의 숏폼을 보았다. 나는 모를 알고리즘으로 걸려 있었다. 다큐는 하늘나라로 떠난 아이를 가상현실에서 엄마 아빠가 다시 만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남편에게 다큐 이야기했더니,     

“너는 그런 것을 잘 보더라.” 한다.     

전에는 그런 말을 들으면 따끔,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꼭 저런 말을 하기는 했는데, 언제인가부터 꼬아 듣지는 않았다. 


남편은 다른 사람의 일에 후천적으로 무관심한 편. 천성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되, 남에게 쏟을 관심과 집중력을 가족이나 친지, 자신 안으로 투입시키려 노력한 지 오래된 사람이다. 세상에 남편 같은 사람만 있다면, 모든 가십거리나, 험담은 거의 없어졌을지도.     

나의 이런 시청 행태가, 불행 포르노에 대한 소비심리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한 적은 있지만, 과연 ‘불행 포르노’란 말을 써도 되는가? 말의 쓰임의 정의와 이력이 궁금했다.      


잡지 얼루어의 에디터 장 모 씨의 기사에 따르면,     


주로 극 중에서 캐릭터에게 일어나는 비극적인 요소를 억지로 부풀려 표현하는 서사를 의미하는 경멸의 단어가 바로 ‘불행 포르노’입니다. 다른 말로 ‘캐릭터 학대’라고도 하는데요. 동정심을 유발하다 못해 독자로 하여금 우울한 감정에 이르게 하죠. 마치 쾌락을 일시적으로 강하게 자극해 끝내 허무한 감정을 들게 만드는 포르노와 비슷한데요. 빈곤 포르노처럼 동정심을 억지로 유발해 자극적인 요소로 사용하기 때문에 분명 부정적인 단어임에는 확실합니다.     


아, 정의가 이랬나, 그렇다면 이런 다큐 시청에는 쓰일 수 없는 용어겠구나 했는데, 뒤이어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행 포르노는 거창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작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급성장한 유튜브 중 이혼하고 아이 키우는 싱글맘의 일상, 중소기업 다니다 퇴사하고 백수로 살아가는 청춘의 브이로그 등의 조회수가 높은 이유 역시 불행 포르노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죠. 타인의 일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클릭이었지만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만이 구독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이들의 일상을 바라보는 것에는 일종의 ‘자기 위안’이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속에는 ‘이런 삶도 있네’, ‘사는 것 다 비슷하구나’, ‘그래도 이 사람보단 내가 낫지’, ‘힘들겠다’라는 다양한 감정들이 공존하고 있을 거예요.     


불행포르노라는 의미를 둘러싼 저변의 대담들은 이 영상 미디어의 시대에 어느새 확장되어 있구나. 

정치는 생물,

입시도 생물,

생물이란 말을 아무 데나 갖다 붙여 웃기다 생각했었는데, 나도 한번 써 보자. 

이런 단어도 생물.     

프로그램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큐라든가 리얼 브이로그 등이 태생적으로 갖게 되는 한계가 있을 텐데 그 한계를 만드는 사람 또한 시청자와 구독자들이겠지. 


사실 이런 인식을 갖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젊을 적에는 빈곤과 불행, 폭력을 대리하는 서사들을 무분별하게 소화했었다. 관련 다큐도 잘 보고 영화도 곧잘 보았다. 보고 난 후 감상이 자기 위안인지 동정인지 르상티망인지 분별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나서 처음 관람하러 간 영화관에서 중간에 뛰쳐나온 적이 있는데, 제주 4.3 사건을 다룬 ‘감자’라는 영화였다. 

지금도 한 공주, 다음 미선, 도가니, 도희야 류의 영화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지 못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다큐는 잘 본다. 부모 잃은 아이가 조부모와 지내며 힘든 삶을 꾸려가는 다큐. 온 가족이 불행을 힘겹게 이고 지고 살아가는 다큐.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한 사람들의 다큐, 가족 구성원을 잃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다큐.      


왜 가공한 실제 이야기는 보지 못하고, 실재가 실제 하는 이야기는 손쉽게 보게 되는 걸까.      

그제 남편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젊었을 때의 무분별한 시청 습관이 아직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젊었을 때는 생각도 없고, 사는 것도 힘들었고, 가치관도 없고, 취향도 없었다. 그런 습관이 아직 모두 정돈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다큐멘터리에 대한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      


남편의 ‘너는 그런 것을 잘 보더라’의 말에 담긴 속뜻은, ‘가까운 사람의 아픔이나 슬픔에 더 공감하고 그들을 위해 노력하고 에너지를 쏟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관심)이지 않겠나’이다. (몇 번 이런 일이 반복되었음)     

가까이는 대상포진으로 힘들어하는 둘째 이모부터,

지인들 중 불의의 사고로 아빠를 잃은 아이의 학교 친구들까지. 

친인척 지인들의 불행을 보듬고 안는 것은 물론, 그런 관심과 온정이 넓게 확대되어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을 사회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최선일 것이며,

남편의 그 말은, 나의 그렇지 못한 현재를 방증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사회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참사나 재난, 그리고 사람사의 슬프고 낯선 이면을 가공하여 이야기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 아직은 지지부진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고 노력하며, 그런 일을 기꺼워하기를. 

넘어서서 즐거워할 수 있게 되기를.


2025년의 나에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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