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의 온도> 시리즈 10 (1)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사진 한 장 앞에서 손이 멈췄다.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던 작은 방, 얇은 커튼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그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꾸밈이 없었고, 계산도 없었다. 마치 그날의 공기까지 사진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그때의 나는 한국에서의 나였다. 어디에 속해 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말이 막히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 말은 입술 끝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마음은 굳이 번역하지 않아도 바로 닿았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가벼웠지만, 결코 얕지는 않았다. 그저 삶을 미리 계산하지 않았던, 그런 나였다.
그리고 지금, 거울 속의 나는 캐나다에서의 나다. 사진 속의 나보다 분명 더 많은 시간을 통과했고, 더 많은 침묵을 배웠다. 말문이 막히는 순간을 수없이 지나왔고, 설명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오래 살아왔다.
처음 이민을 왔을 때, 나는 자주 나 자신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언어가 따라주지 않으면 마음도 함께 작아지는 것 같았고, 익숙했던 나의 모습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이런 순간도 있었다. 말은 머릿속에서 분명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했다. 그 짧은 거리 사이에서 마음이 주저앉는 날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종종 사진 속의 나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나는 여전히 나인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알게 된다. 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하고 있었던 것뿐이라는 것을. 사진 속의 나는 멈춰 있는 시간이었고, 지금의 나는 흐르고 있는 시간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둘은 결국 같은 사람의 다른 순간이니까.
사진 속의 나는 나를 떠올리게 하고, 지금의 나는 나를 다시 만들어간다. 그 둘이 손을 맞잡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이듦의 온도를 느낀다.
젊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조급함 대신의 여유, 독선이나 자만 대신의 이해였다. 예전처럼 쉽게 웃지는 않지만, 웃음이 필요한 순간을 더 잘 알게 되었다.
나이듦은 어쩌면 ‘속도가 느려지는 과정’이 아니라 ‘깊이가 생기는 과정’ 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지나쳤던 것들이 이제는 오래 머물고, 예전에는 쉽게 말하던 것들이 이제는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사진 속의 나는 질문이 적었다. 지금의 나는 질문이 많다. 하지만 그 질문들은 나를 흔들기보다,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놓아도 되는가, 무엇만은 끝까지 품고 가야 하는가. 그 질문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민자의 삶은 나에게 두 개의 얼굴을 주었다. 하나는 사진 속에 남아 있는 익숙한 나이고, 다른 하나는 낯선 땅에서 천천히 만들어진 지금의 나다. 그 둘은 경쟁하지 않는다. 서로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겹겹이 쌓인 시간 속에서 조용히 손을 맞잡고 있다.
한국에서의 나는 나의 뿌리이고, 캐나다에서의 나는 나의 가지다. 뿌리가 없으면 가지가 자랄 수 없고, 가지가 뻗지 않으면 뿌리는 제자리에서만 머문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렸지만, 결국 그 흔들림이 나를 자라게 했다.
이제 나는 사진 속의 나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의 나를 다독인다. 이만큼 살아낸 시간, 이만큼 견뎌낸 하루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주름은 삶의 기록이고, 흰 머리는 시간이 남긴 흔적이다. 그것들은 숨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조용히 받아들이고 싶은 것들이다.
사진 속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네가 상상하지 못한 길 위에서, 너는 생각보다 잘 살아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도 말해준다. 지금 이 모습으로도 충분하다고. 너는 이미 많은 것을 지나왔고, 여전히 나아가고 있다.
그 두 목소리가 내 안에서 조용히 만나는 순간, 나는 나이듦의 온도가 차갑지 않다는 것을 다시 느낀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따뜻해진다.
사진 속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그 온도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사진 속 나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며 나 자신에게 웃고 있었고, 지금의 나는 그 햇살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 기억과 현재가 만나면서, 나는 나이듦의 온도를 조금 더 분명히 체감한다.
이제 나는 그 온도를 따라, 나이듦의 시간을 천천히 기록해보려 한다. 이민자로서의 삶, 중년 이후의 변화, 가족과의 관계, 계절과 기억, 그리고 나를 지탱해온 작은 일상들까지.
이 시리즈는 그 모든 온도를 담아내는 여정이 될 것이다. 멈춰 있던 시간과 흐르는 시간이 서로를 비추는 이야기, 그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조용히 적어 내려가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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