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의 온도> 시리즈 10 (4)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래된 얼굴들이 문득 떠오른다. 한국에서의 가족, 친구, 교회 식구들, 동료들. 그들과 나누던 말들, 함께 웃던 순간들, 그리고 함께 걸었던 골목길의 공기까지. 계절의 냄새와 햇살, 바람은 그 기억을 고스란히 불러온다. 마치 시간의 문이 살짝 열리며, 그 안에서 오래된 사람들이 조용히 걸어나오는 듯하다.
봄바람이 살짝 스치면 부모님의 손길이 그립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걷던 동네 골목은 늘 봄이 먼저 찾아오는 곳이었다. 햇살이 벽돌 담장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고, 시장 앞 떡집에서는 갓 쪄낸 떡 냄새가 골목 끝까지 퍼졌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따뜻해졌네, 이제 봄이네”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은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캐나다의 봄은 한국보다 조금 더 차갑고 느리게 오지만, 그 속에서도 한국의 봄이 마음을 먼저 데워준다. 창밖을 스치는 바람에 햇살이 반짝이면, 부모님의 손길과 웃음이 떠오른다. 딸만 셋인 우리 집에서, 나는 11년 터울 막내로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엄마의 손등에 비치던 햇살, 머리를 쓰다듬던 따뜻한 손길, 말없이도 마음이 편안해지던 순간들. 그 기억들은 20년 넘게 낯선 땅에서 살아온 지금도 내 안을 조용히 감싼다.
캐나다에서의 첫 봄, 나는 한국의 골목길과는 다른 풍경 속에서 혼자 길을 걸었다. 아직은 바람의 차가움이 피부에 와 닿았지만, 작은 꽃망울이 피어난 공원 벤치 위에서 햇살을 맞으며 숨을 고르는 순간, 마음속 한국의 봄이 살짝 비집고 들어왔다. 그때 깨달았다. 익숙함이란 장소가 아니라, 기억과 마음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걸.
여름이 되면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강가에서 뛰놀던 아이들, 밤마다 이어지던 수다와 노래, 함께 나누던 작은 고민들. 한여름 밤, 시원한 강바람에 땀이 식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의 나와 친구들이 함께 웃던 장면이 마음속에서 펼쳐진다.
캐나다의 여름은 한국보다 짧고 선선하지만,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겹쳐 들린다. 지난여름, 작은 호숫가 공원에서 벤치에 앉아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일 때, 문득 친구들과의 여름밤이 떠올랐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나라에서 각자의 삶을 살지만, 그 웃음소리는 여전히 마음 한켠에서 반짝인다.
가을이 오면, 나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놓치고 지나친 시간들, 사랑했던 사람들,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 그리고 조금씩 달라진 나 자신. 한국의 가을은 특히 선명했다.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길가의 나무들이 노랗고 붉게 물들던 풍경 속에서 늘 누군가를 떠올렸다. 함께 걷던 사람, 함께 울던 사람, 말없이 곁을 지켜주던 사람들. 그 기억들은 지금도 가을바람 속에서 조용히 되살아난다.
캐나다의 가을은 짧지만, 넓고 고요하다. 산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단풍 속에서 걸을 때면, 한국의 가을과 그리운 사람들이 겹쳐진다. 단풍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나는 숨을 고르며, 마음속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지금의 나를 확인하고, 익숙함을 조금씩 만들어간다.
겨울은 가장 깊은 그리움을 남긴다. 눈송이가 한없이 내려 쌓이면, 한때 함께였던 사람들이 떠올라 마음 한켠이 허전해지기도 한다. 한국의 겨울은 늘 분주했다. 연말 모임, 가족 행사, 따뜻한 국물 요리, 집 안 가득 퍼지던 온기. 캐나다의 겨울은 길고 조용하다. 눈이 쌓인 거리, 고요한 새벽,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 그 고요함 속에서 오래된 사람들을 떠올리고, 나는 깨닫는다. 그 그리움 속에서도 나는 살아 있으며, 이곳에서 나를 지켜온 시간들이 내 안에 단단히 쌓여 있다는 것을.
계절마다 떠오르는 사람들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그들은 나를 이어주는 기억이며,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존재다. 한국과 캐나다, 두 곳에서 살아온 나의 삶을 연결하는 작은 다리이기도 하다. 그 다리가 있었기에 나는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낯선 땅에서 익숙함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느리고 조심스럽다. 작은 습관과 사소한 풍경 속에서 나는 나만의 온도를 찾아간다. 눈 덮인 공원 벤치, 호숫가의 바람, 겨울 아침 창밖 햇살 한 줄기, 커피 향 가득한 주방—이 모든 작은 순간들이 이곳에서의 삶을 조금씩 내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의 기억,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오늘도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차갑지만 고요한 겨울 아침.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 위 눈송이가 살짝 흔들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눈밭 속에 은은하게 퍼진다. 그 모든 것이 내 안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인다.
“겨울이 깊어도, 그 사람들은 내 안에서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 속에서 나답게 살아가고 있다.”
낯선 땅에서, 계절과 기억 속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익숙함을 쌓아가며, 나는 오늘도 나이듦의 온도를 천천히 느낀다. 그 온도가 차갑게만 느껴지는 날에도, 마음속 따뜻한 빛이 나를 지켜준다. 이 작은 다리 위에서 나는 계속해서 나답게 살아간다.
해시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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