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바다 앞에서, 글로 만난 인연을 처음 마주했다

<시간과 인연의 자리>시리즈 11 (2)

by 이민자의 부엌

포항 바다가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나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바다는 생각보다 훨씬 잔잔했고, 그 고요함은 오히려 내 안의 작은 흔들림들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파도는 조용히 밀려왔다가 다시 물러나기를 반복했지만, 내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더 분주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앉기를 반복했다. 테이블 사이의 간격을 살펴보고, 입구에서 들어오는 동선을 눈으로 그려보았다. 그분이 휠체어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편함 없이 들어오실 수 있는지, 자리에 앉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혹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은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것이 거창한 배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작은 준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한국 방문은 여러 의미에서 내게 특별한 시간이었다. 일년만에 다시 밟은 고국의 땅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글로만 이어져 있던 인연들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조용히 자라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글로 맺은 인연은 언제나 특별한 자리로 남아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관계, 가까이 있지 않지만 때로는 누구보다 깊이 닿아 있는 사람들. 현루 작가님은 나에게 그런 분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채, 브런치라는 공간 안에서 각자의 삶을 글로 건너다보던 사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그분의 시간을 오래 바라본 사람처럼 느끼고 있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삶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 문장 사이에 머물러 있는 감정을 따라 걷는 일이었다. 그렇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깊이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번 만남은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시간을 다시 마주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남편의 출장 스케줄이 잡혔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브런치에서 알게 된 몇 분의 작가님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중에서도 현루 작가님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분이었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연락을 드렸고, 포항에 계신다는 답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했을 때,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원하면, 나는 무엇이든 좋아.” 그 말은 짧았지만 충분했다. 그 한 문장이 나를 포항으로 이끌었다.


포항은 남편에게는 처음 가보는 도시였고, 나에게는 아주 오래전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 스쳐 지나가듯 방문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오래된 필름처럼 바랜 기억 위에 새로운 시간이 덧입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렘인지 긴장인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인지 스스로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남편에게 “첫사랑을 만난 적은 없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 같아”라고 말했다. 우리는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가벼움보다는 조용한 기대와 조심스러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레스토랑 문이 열렸다. 도우미 요양사님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마주 앉았고, 인사를 나누었으며, 곧바로 대화를 시작했다.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도, 어색한 침묵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우리는 글로 충분히 만나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하며 이어진 대화는 조용했고 깊었으며 따뜻했다. 말의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결코 얕지 않았다. 문장에서 느껴지던 그분의 결이 이제는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숨결 속에서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고,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말이 멈추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 침묵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시간은 분명 흐르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흐름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저 같은 시간을 함께 건너가고 있다는 느낌만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머무름에는 언제나 끝이 있다. 도우미 요양사님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시간을 조금 더 붙잡고 싶은 마음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작별 인사를 나누는 순간,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저려왔다.


현루 작가님은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두 번의 뇌출혈로 인해 왼쪽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었고, 간암 3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가까운 가족도 없었다. 한때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스님의 길을 걸으셨지만 그 삶 또한 내려놓아야 했다. 나는 그동안 그분의 글을 읽으며 그 삶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날, 내가 마주한 삶의 무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이해로는 닿을 수 없는 깊이였고, 설명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그 사람의 시간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눈빛 안에는 고통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체념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너머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느껴지는 단단한 평온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글을 통해 느껴왔던 깊이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그것은 단순한 문장의 힘이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만들어낸 결이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그러나 그 약속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이 데려온 인연을 놓치지 않겠다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마음의 약속에 가까웠다.


포항에서 돌아오는 길,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다. 남편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번 만남은 하나의 일정이 아니었다. 어디를 들르고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이 내게 건네준 하나의 장면이었다. 현루 작가님은 자신의 시간을 글로 견디고 있었고, 그 글은 다시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어떤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 길은 혼자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많은 시간들이 서로를 향해 이어지며 만들어낸 방향일지도 모른다. 그날의 바람과 바다, 그리고 작가님의 눈빛은 지금도 내 안에서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파문처럼, 조용하지만 오래 머무는 감각으로 남아 있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나는 아버지의 시간 앞에서 울었고, 현루 작가님 앞에서 마음이 깊어졌으며, 여행 중 만난 인연들 속에서 삶의 넓이를 다시 배웠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삶이 데려오는 인연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이 서로를 향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과인연의자리 #브런치에세이 #산문에세이 #인연의의미 #만남의기록 #글로만난인연 #포항여행 #삶의깊이 #조용한사유 #관계의온도 #이민자의시선 #한국방문기 #사람과사람 #마음의기록 #잔잔한여운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