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인연의 자리>시리즈 11 (3)
메일을 보내고 나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알림은 없었지만 괜히 화면을 켜보고, 다시 내려놓았다가 또 한 번 확인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스스로도 웃음이 났지만, 그 마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고요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잔잔한 파문이 번지고 있었다. 아주 작고 조용한 변화였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움직임이었다.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늘 그렇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가장 많이 움직이는 시간이다. 보이지 않는 사이에서, 마음은 혼자 먼저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이번 한국 방문을 앞두고, 나는 한 분의 작가님께 조심스럽게 메일을 보냈다. 브런치를 하며 글을 읽다 보면 유독 마음이 오래 머무는 분들이 있다. 문장의 결이 단단하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진실하며, 무엇보다 문장 사이로 스며 나오는 온도가 따뜻한 사람들. 그 작가님의 글은 나에게 그런 것이었다. 그 글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고, 읽고 나면 마음이 조용해졌다.
멀리 캐나다에서 그 글을 읽고 있으면, 실제로 만난 적이 없어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졌다.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 위에 놓인 삶이었지만,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그 거리는 어느 순간 의미를 잃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인연은, 만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굴을 보기 전에도 마음이 먼저 닿는 경우가 있고, 이름보다 먼저 온기가 전해지는 관계도 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 번 찾아뵙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보내고 난 뒤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마음은 몇 번이나 그 자리를 오갔다. 혹시 폐가 되지는 않을까, 너무 갑작스러운 부탁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 뒤 도착한 답장은, 정성스럽게 마음을 눌러 담아 쓴 편지에 가까웠다. 조심스러움 속에서도 반가움이 느껴졌고, 한 문장 한 문장마다 그분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그 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밝아졌고, 멀리 떨어져 있던 거리감이 문장들 사이에서 천천히 좁혀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던 간격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있었다.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자 그는 늘 그렇듯 단순하고 따뜻하게 말했다. “당신이 원하면, 나는 무엇이든 좋아.” 그 말은 길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망설이던 마음이 그 자리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남편은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나는 혼자 가겠다고 했다. 만나고자 하는 작가님이 여성분이기도 했고, 처음 마주하는 자리에서는 두 사람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더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속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다.
한국에 도착한 후,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주 소박한 준비를 했다. 시차 적응이 덜 되어 피부는 많이 지쳐 있었지만, 평소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 나는 선크림과 립스틱 정도만 바르는 사람이다. 그래도 조금은 더 밝은 얼굴로 만나고 싶어서 물을 자주 마셨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정성이었다. 캐나다에서 미리 챙겨온 옷도 꺼내 보았다. 거울 앞에 서서 이 옷이 괜찮을지, 저 옷이 더 나을지 잠시 고민하는 시간. 길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그 시간마저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마음을 쓰는 일은 생각보다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약속을 몇 시간 앞두고, 작가님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나는 그 문자를 천천히 읽었다. 갑작스러운 허리 통증으로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빨래를 꺼내다 허리를 삐끗했고, 밤새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내용. 그리고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이제야 연락을 드린다는 내용과 함께,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무엇보다 그 만남을 위해 연차까지 내어두셨다는 이야기에, 그 마음의 무게가 더 깊이 전해졌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도 아쉬움보다 다른 감정이 먼저 다가왔다. 얼마나 고민하셨을까, 얼마나 미안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였다. 그 작가님은 내가 유독 오래 머물며 읽어왔던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문장에서 느껴지던 따뜻함이 그 순간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여린 마음을 가진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몸의 통증보다 마음의 부담이 더 크게 다가오는 사람. 그 마음의 무게를 가만히 떠올려 보게 되었다
그래서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작가님, 절대 미안해하지 마세요. 몸이 먼저입니다.” 그 말은 준비된 문장이 아니었다.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 남편도 조용히 말했다. “허리 통증은 정말 갑자기 와. 그럴 때는 아무것도 못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상의 한 순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자를 보내고 나서, 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앉아 있었다. 준비해두었던 옷이 눈에 들어왔고, 마시려고 꺼내둔 물컵도 그대로였다. 예정되어 있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결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조용한 깨달음이 스쳤다.
우리는 그날 만나지 못했지만, 이미 충분히 닿아 있었다는 것.
그 자리는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비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이미 누군가 다녀간 자리처럼 온기가 남아 있었다. 멀리 캐나다에서 시작된 마음이 한국이라는 같은 시간 속으로 건너와, 실제로 마주 앉지는 못했지만 이미 서로의 자리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의 아쉬움은 놓쳐버린 시간이 아니라, 다음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내년에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의 멈춤조차도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받아들여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은 반드시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안에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말보다 먼저 마음이 닿고, 얼굴보다 먼저 온기가 전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안다. 이날의 기다림과 멈춤이 언젠가 마주하게 될 그날의 온기를 더 깊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을.
그날 우리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 자리는 오래 따뜻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지금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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