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땅에서 피어난 밥상의 기억> 시리즈 3 (4)
올해는 우리 부부에게 유난히 특별한 한 해로 남을 것이다.
바로, 된장과 간장을 직접 담가 먹기로 결심한 해이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으로 메주를 빚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콩을 씻는 순간부터 어린 날의 추억이 피어올랐고,
삶은 콩의 고소한 향이 부엌 가득 퍼질 때마다
몸과 마음이 함께 따뜻해졌다.
그 설렘은 단순한 음식 만들기를 넘어,
삶의 뿌리를 다시 찾는 여정처럼 느껴졌다.
유기농 노란콩 10킬로그램을 여러 번 정성껏 씻어
하룻밤 동안 물에 불렸다.
다음 날 아침, 큰 곰솥 두 개를 꺼내어
센 불로 끓이다가 중불로 줄여 네 시간 남짓 삶았다.
콩이 푹 익어가며 주방은 구수한 향기로 가득했다.
삶은 콩을 자루에 담아 물기를 빼고,
온 힘을 모아 틀에 넣어 단단히 눌렀다.
손끝에서 탄생한 메주 한 덩이, 한 덩이가
작은 생명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무게와 온기, 손바닥에 닿는 질감까지
모두가 내게는 ‘책임이자 기쁨’이었다.
캐나다에서는 볏짚을 구하기 어려워 대신 밀짚을 사용했다.
밀짚을 식초물에 담가 한 시간 동안 소독하고
햇살 좋은 날에 사흘 동안 말렸다.
전기장판 위에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밀짚을 펼친 뒤,
갓 빚은 메주를 가지런히 올려 덮었다.
따뜻한 온기 속에서 사흘간 1차 발효가 이루어졌다.
그 시간, 부엌 안은 고요했지만 살아 있는 기운으로 가득했다.
밤이면 메주가 숨 쉬는 듯한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고,
나는 그 곁에서 조용히 손끝으로 온기를 전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대화를 나누듯,
메주와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1차 발효가 끝난 메주는 밀짚과 함께 박스에 층층이 쌓아
2차 발효에 들어갔다.
2주가 지난 어느 날,
곰팡이가 피어난 메주 표면을 들여다보며
자연의 신비로움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 모습은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장을 담그시던 기억을 불러왔다.
그분들도 이렇게 계절의 흐름에 맞춰
손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장을 빚으셨겠지.
2차 발효를 마친 메주는 이제 햇살 아래서 한 달간 말릴 차례다.
그 후엔 작은방에 매달아 음력 정월까지 기다릴 것이다.
“정월에 담근 장이 가장 맛이 깊다.”
어릴 적 들었던 그 말을
이국의 하늘 아래서 다시 되새기며 실천한다.
된장을 담을 항아리도 준비했다.
한인 마트에서 어렵게 구한 두 개의 항아리.
한국보다 세 배나 비쌌지만, 나는 끝내 항아리를 고집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항아리에 장을 담으시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반질반질하게 씻은 항아리를 백야드 한켠에 가지런히 두었다.
햇살이 항아리 표면에 내려앉자
이곳이 낯선 땅이라는 사실이 잠시 잊혔다.
그 순간, 이곳이 아닌 고향 마당 한켠에 서 있는 듯했다.
찬바람 속에서도 햇살을 머금은 항아리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고 고향의 냄새와 소리를 떠올렸다.
올해 처음으로 빚은 메주,
그리고 곧 이어질 된장과 간장의 여정은
결코 단순한 음식 만들기가 아니다.
그건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리고,
삶의 뿌리를 되찾는 시간이다.
이국의 겨울 햇살 아래,
우리 부부의 작은 항아리에서
고향의 향기가 천천히 피어나고 있다.
콩과 밀짚, 손끝의 정성, 그리고 시간의 힘이 모여
우리 가족의 밥상을 지켜줄 깊은 장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이 메주가 있어, 우리는 여기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손끝의 따뜻한 질감과 부엌 가득 퍼지는 고소한 향기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고향은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정성이 깃든 이 밥상 위에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