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 땅에서 피어난 한국의 맛, 김장김치 이야기

<이국땅에서 피어난 밥상의 기억> 시리즈 3 (3)

by 이민자의 부엌
ChatGPT Image 2025년 11월 7일 오전 08_52_16.png



오늘은 1년 내내 우리 부부의 식탁을 책임질 김장김치를 담그는 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부엌은 분주했고, 마음은 묘한 설렘으로 차올랐다.


배추 30포기, 무 10개, 청갓 2단, 대파 3단.
단호박과 땅콩호박, 마늘과 생강까지 정성껏 준비된 재료들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한국에서 어렵게 공수해온 새우젓, 까나리액젓, 멸치액젓, 마른청각, 고춧가루는
그 자체로 고향의 향기를 품은 보물 같았다.


손끝에 닿는 그 재료의 온기 속에서
나는 20년 전, 처음 캐나다에 도착하던 날의 설렘과 두려움을 함께 떠올렸다.
그때 처음 차려낸 밥상, 낯선 땅에서 익숙한 냄새가 주던 위안—
그 모든 기억이 부엌 안을 천천히 감싸는 듯했다.


누군가는 절인 배추를 사면 훨씬 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음식은 손끝의 정성이 닿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그래서 이번에도 배추를 직접 절였다.


천일염에 배추를 절여 12시간 동안 기다리는 동안,
나는 소금물이 배추 잎 사이로 스며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배추가 숨을 죽이고, 서서히 부드러워지는 그 시간은
마치 조용한 명상 같았다.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변해가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꼈다.


양념을 준비하는 시간은 작은 축제였다.
큰 솥에 물을 붓고 디포리멸치, 다시마, 말린표고, 황태머리, 대파, 양파, 사과를 넣어
진한 육수를 우려냈다.
센 불에서 중불로 불을 낮추자, 부엌은 따뜻한 향기로 가득 찼다.
겨울의 찬 공기 속에서도 마음까지 데워주는 향기였다.


육수를 식히며 찹쌀풀을 쑤어 붓고,
그 위에 고춧가루와 무채를 버무렸다.
마늘, 생강, 새우젓, 까나리액젓, 멸치액젓, 돌산갓, 마른청각, 대파를 더해
양념이 완성되자, 붉은 빛이 부엌 한쪽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이번 김치의 비밀은 단호박과 땅콩호박이었다.
껍질을 벗겨 푹 삶은 뒤 부드러운 죽으로 만들어 양념에 섞었다.
설탕 대신 자연의 단맛을 더한 호박죽이
양념의 깊은 풍미를 완성시켜주었다.
그 향은 달콤하면서도 포근해,
한겨울에도 마음이 녹아내릴 듯했다.


절여둔 배추를 여러 번 헹궈 물기를 털고,
이제 양념을 한 포기씩 속속 채워 넣었다.
배추잎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덧입히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손끝은 점점 느려졌지만,
그만큼 마음은 더욱 단단해졌다.


우리 자녀들은 각자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큰아이는 영국, 둘째는 뉴욕, 막내는 이곳 캐나다.
그래서 김장김치는 결국 우리 부부의 몫이다.
친구들은 “둘이 먹는데 30포기나?” 하며 웃지만,
나는 늘 대답한다.
“이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방식이에요.”


할머니와 어머니가 지켜오신 한국의 밥상은
그저 한 끼의 식사가 아니다.
삶의 철학이자, 건강의 뿌리다.
나는 그 정신을 이곳에서도 잃고 싶지 않았다.
이국 땅에 살아도,
그 밥상의 정신은 여전히 내 마음의 중심에 있다.


김장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다.
그 안에는 계절의 정수와 가족의 온기가 담겨 있다.
한 해 동안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줄 이 김치가
나는 참 고맙고 자랑스럽다.


오늘, 김치 속을 다 채우고 마지막 한 포기를 덮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이 김치가 있어, 우리는 이곳에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


햇살이 스며든 부엌 한가운데,
김치 양념의 붉은 빛이 따뜻하게 번진다.
그 빛 속에는 고향의 시간, 어머니의 손길,
그리고 이국 땅에서도 변치 않는 나의 뿌리가 살아 있다.


오늘, 이 김치를 담그는 순간이
내게는 가장 한국적인 하루다.
손끝에 닿는 정성과 부엌을 가득 채운 향기 속에서
나는 다시, 한국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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